[결단의 순간들]넷피아 이판정 사장(1)

“꿈은 포기하지 않는 열정의 자리에서 싹을 틔운다!”

젊은 날, 나는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다. 이러한 고민은 동아대 법학과 합격통지서가 보장해 주는 온실 속의 길 대신 미래를 향한 도전정신으로 남보다 먼저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했다.

출판사와 음반 제작업, 학원과 독서실 운영, 지역 생활 광고업, PC통신 지방선거 홍보 등 10여 가지가 넘는 각종 직업과 사업 경험을 통해 나는 삶의 여러 단면을 겪었다. 한때 건물 화장실 청소와 계단 청소, 우유 배달도 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지방 농협에서 서울에 매실액을 판매하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와 흔쾌히 승낙했다. 나중에는 성실함을 인정 받아 농협에서 관리직 일을 맡았다.

그 후 사업에 대한 마음을 접고 변리사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변리사 시험이 결코 만만한 시험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때 우리나라에 막 도입되기 시작한 인터넷 분야를 접하게 됐고 어느덧 특허와 함께 사이버 상표의 일종인 인터넷 도메인네임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결국 나는 변리사 준비를 위한 열정이면 사업을 하는 게 낫겠다는 특허법 선생님의 권고로 3년 동안 준비해오던 시험을 뒤로하고 1995년 본격적으로 인터넷 사업에 뛰어 들었다.

사실 한글인터넷주소의 중요한 사업적 기반이 그때 변리사 시험 준비를 위해 공부한 법률 지식, 특히 특허법 관련 지식을 통해 만들어 질 수 있었고, 오늘의 넷피아를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기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터넷은 다양한 신 산업들을 우리 사회에 등장시켜 새로운 기회로 다가 왔고 그 기반인 인터넷주소 산업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는 인터넷이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기업의 시스템 엔지니어조차 ‘도메인’이라는 단어 자체를 생소하게 느끼던 때라 도메인 등록을 권유하면 “돌멩이를 등록하라고요?”라고 말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던 시기였다. 내가 처음 둥지를 튼 곳은 대치동 은마아파트 상가단지였다. 5평 남짓한 사무 공간에 IBI(Internet Business Institute)라는 상호를 내걸고 ‘국토는 좁지만 사이버 영토는 세계 최대로’라는 슬로건으로 험난한 인터넷 사업을 시작했다.

1996년 모 언론사와 공동으로 기업 도메인네임 돌려주기 운동을 전개한 것이 인연이 돼 한국전산원 산하 인터넷주소 위원회 위원으로 기업체 대표로는 유일하게 활동을 하게 됐다. 이 당시 닷케이알(.kr) 도메인의 체계 중 지역 도메인과 학교 도메인의 정책 수립 과정에 참여 하던 중 이런 복잡한 영문 인터넷주소 체계 대신 손쉬운 한글인터넷주소를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약 1년 여의 우여곡절 끝에 막연히 신기루처럼 느끼고 있던 한글인터넷주소 기술 구현이 파트너 사무실에서 그 첫 선을 보이게 됐다. 이때 세상에 새로운 문이 열리던 그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판정@넷피아(pjlee@net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