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시대 `고물` 디지털시대엔 `보물`

하이엔드급 디지털 AV기기가 판치는 이때, 용산과 청계천 어느 구석진 가게에서는 먼지 쌓인 턴테이블과 진공관 앰프가 수백만원에 팔려나간다. 지금 이 순간도 어디선가 누군가의 허리에서는 삐삐가 울려댄다. 5월 현재 국내 무선호출 가입자수는 10만명. 그 수는 증가일로다. PDP며 LCD며 날렵한 첨단 디지털TV가 거실 한쪽을 점령하고 있어도, 배불뚝이 브라운관TV는 여전히 국내 TV 판매량의 절반. 건너방 한켠에 얌전히 자리보전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일반 CRT TV다.

 ‘올디스 벗 구디스(oldies but goodies).’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이 문구가 전기·전자업계에서도 금언처럼 회자되고 있다. 이들 올디스 벗 구디스형 제품은 그대로 과거의 향수와 인간미에 대한 절대 불변의 메타포다. 0과 1에 찌들어 사는 우리들의 아날로그적 감성 코드를 깨우는 각성제다.

 서울 용산 원효전자상가 4동. 세련되게 단장된 전자랜드의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한 이 허름한 상가에는 소위 ‘빈티지 오디오’라 불리는 기기들을 파는 매장이 밀집돼 있다.

 빈티지(vintage) 오디오란 주로 1950∼60년대에 미국·독일 등지에서 생산된 턴테이블과 진공관 앰프, 스피커 등 ‘골동품 오디오’를 일컫는다. 하지만 인간의 소리와 악기의 본원적 음색에 가장 근접한 최고의 사운드를 내는 고가 명품 오디오를 뜻하는 대명사로 더 많이 통칭된다. 일례로 EMT, 토렌스, 가라드 등 최고의 빈티지 모델들은 턴테이블만 150만∼500만원에 달한다.

 디지털보다 아날로그를 선호하는 이들을 일반적이라 할 순 없다. 하지만 극소수 ‘오디오광’ 정도로 치부하기에는 이들이 갖는 구매력이 만만찮다. 수백만원하는 턴테이블에 박물관에나 가야 구경할 법한 손가락만한 진공관 한 알이 수십만원을 호가한다. 알텍 스피커에 매킨토시275 진공관 앰프, 노이만제 LP 커팅머신 등 세계적 명기로 일체를 갖추려면 웬만한 집 한 채 값은 들여야 한다는 말이 빈 말은 아니다.

 1004(천사), 7942(친구사이), 8282(빨리빨리) 등을 기억하는 세대라면 무선호출기, 삐삐를 떠올릴 것이다. 이 삐삐가 요즘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전국에 012 삐삐 서비스를 제공하는 리얼텔레콤에 따르면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지난 연말을 기점으로 매달 1000∼2000명씩 가입자가 늘고 있다.

 싸다는 게 삐삐의 최대 장점이다. 3∼5만원의 단말기 가격에 월 기본료는 8000원. 음성사서함, 광역서비스 등 부가서비스를 신청해도 각각 2700원이면 된다. 때되면 알아서 삭제되는 핸드폰 음성 메세지와 달리 수년전 옛 애인의 음성을 가끔씩 꺼내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삐삐의 장점 중 하나다. 기억이 가물거리는 왕년의 삐삐족들을 위한 팁 하나. 음성메시지 녹음시 시간을 연장하려면 별표(*)를 두 번 누르면 된다.

 이 같은 특수로 뜻밖의 대박을 터뜨리고 있는 업체도 있다. 기라성같던 삐삐 제조업체들이 모두 휴대폰 단말기 사업으로 돌아설 때 뒤늦게 삐삐, 즉 무선정보단말기 시장에 뛰어든 한텔은 국내시장 석권은 물론, 현재 미국 삐삐시장의 절반을 점하고 있다. 미국내 삐삐 가입자수는 1500만명에 달한다. 이에 따라 작년에 매출액 461억원을 기록한 이 업체는 올해 매출 목표를 1105억원으로 대폭 늘려 잡고 있다.

 삼성전자 등 가전업체들이 속속 단종을 발표하고 있는 브라운관 TV도 최근 찾는 손길이 부쩍 늘고 있는 기현상 품목 중 하나다. 특히 EBS 수능 특수로 세컨드TV 개념의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는 게 가전유통가의 전언이다. 이에 따라 최근 디스플레이 시장에서는 CRT 브라운관 가격이 폭증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밖에도 최근 2004년형 모델로 새롭게 부활한 모토로라의 휴대폰 ‘스타택’을 비롯해 모바일게임으로 다시 태어나 인기를 끌고 있는 ‘겔러그’, 필름 카메라의 대명사 ‘니콘 FM2’ ‘캐논 EOS’, 기계식 바늘시계 ‘론진 레프리카’, 수동식 타자기 ‘헤밍턴’ 등이 앤틱 마니아족이 손꼽는 으뜸 명기들이다.

 <류경동기자 ninan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