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효창동에서 10년 넘게 가전 도매상을 해 온 L사장. 그는 지난 2월 창고를 내놓았다. 임대료도 뽑기 힘든 재고 창고를 계속 안고 있는게 부담스러웠다는 게 이유다. 극심한 가전경기 침체 국면속에서 L사장이 선택한 길은 ‘도매장사 폐업’이다. 최고 수십억원의 하루 도매 매출액을 자랑해 온 M유통의 K사장도 최근 자신 소유의 소매 매장있는 테크노마트에 나가있는 시간이 더 많다. K사장은 올 가을 개장 예정인 용산 민자역사 내 전자상가에도 소매 매장을 확대 오픈하는 등 소매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긴지 오래다. K사장은 “가전 도매로 한몫 잡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고 잘라 말했다.
가전 도매상이 사라지고 있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가전 메이커가 자사 채널망 확대에 따른 유통 단계의 축소와 국내 가전경기 침체, 여기에 기존 도매상의 소매상화 현상, 인터넷 등 온라인 유통의 폭발적 성장 등과 맞물려 이같은 현상은 더욱 심화되는 추세다.
9일 용산가전도매협의회은 지난 2000년까지만 해도 소속 회원 업체수가 80여 개에 달했지만 해마다 줄어 지금은 채 30곳도 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협의회 정석동 회장은 “가전 제조업체들의 자체 유통망 강화 전략에 따라 삼성전자는 기존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자사 대리점 만을 통해 일반 소매상과 영업관계를 맺고 있고, LG전자 역시 서울권역에 두 곳의 정책점 만을 둬 소매상 관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02년 이후 국내 가전시장의 주도권 구도가 삼성·LG 등 양대 메이커 체제로 고착화되면서 유통 도매상들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최근 국내 가전 경기의 극심한 침체로 도매업체들 가운데 소매 매장을 새로 겸업하는 곳이 많아지고 있는 것도 전문 가전 도매상의 수가 급감하고 있는 원인중 하나로 꼽힌다.
정 회장은 “유통단계의 축소화는 가전분야 뿐 아니라 전품목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편적 현상”이라며서도 “도매상들의 절대 숫자나 역할이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들고 있기는 하나, 제조업체의 자체 유통망이 담당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만큼 나름의 역할을 찾아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이라고 강조했다.
삼성전자 측은 "도매상이나 총판 등은 이미 오래 전에 설자리를 잃어 일부 대리점이나 전자상가에서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수준" 이라며 "오히려 지금은 ‘디지털프라자’라는 단일 브랜드로 똑 같은 조건에서 채널 유통망을 강화해 나가고 대리점이 소화 못하는 지역은 지역 별 로드숍이라는 개념으로 매출 극대화를 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류경동기자 ninan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