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나노기술로 과학기술 강국의 체면을 살린다.’
한때 구 소련은 그들이 세계 과학자의 4분의 1, 세계 기술자의 2분의 1을 보유하고 있음을 자랑하는 과학기술 선진국이었다. 우주 정거장 미르와 원자력 개발 등에서 세계적 기술력을 보유했던 구 소련은 연방 해체 후 정치적 불안과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면서 과학기술 분야의 퇴보를 겪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러시아는 전세계 나노기술 연구 논문 발표 10위안에 드는 저력을 보이며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옛 영예를 되찾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2002년 3월 크렘린에서 열린 정부 고위 관료와 과학자문위원들과 가진 회의에서 러시아 과학이 지나치게 정부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앞으로 정부의 투자를 나노기술과 같이 산업적 응용 가능성이 큰 분야로 전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통신·전자·항공·신소재·화학 등 5개 영역에 연구비를 늘리고 젊은 과학자의 봉급을 인상할 것을 약속했다.
러시아 국가평의회와 안전보장 이사회는 2002년 5월 학술발전 9개 방향을 정하고 52개에 이르는 위기의 과학기술에 특별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 당시 세르게이 마주렌꼬 산업과기부 차관은 “러시아 경제의 근간을 원료수출에서 기술집적형 산업으로 바꿔야 한다”며 “일부 붕괴 위기에 처한 기술산업을 위해서는 과학센터를 만들어 지원하며 효율성이 없다고 판정되는 과학센터는 연합하거나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산업과기부는 이런 기조에 따라 과학기술 육성자금을 나노 기술과 마이크로 메커니즘 분야에 중점 투자하기로 하는 등 나노과학분야에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런 계획 발표에도 극심한 재정 부족의 문제로 인해 연구개발 시설의 많은 부분에서 경쟁국에 뒤지는 등 경쟁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원천기술과 기반 기술 강국의 자리를 미국과 유럽에 내주고 여전히 과거의 영예를 얻지 못하고 있다.
◇정부 정책=러시아의 나노 기술 정책은 미국이나 일본 등과 달리 대규모의 나노 기술 투자를 바탕으로 이뤄지진 않았다. 러시아는 구 소련 시절부터 중점을 둬온 우주 개발과 무기 등 국방과 관련된 분야의 나노기술 개발이 주를 이루고 있다. 구소련과 러시아의 연구 기관은 이론 물리학과 미세 구조 분야에서 세계 선두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수학과 물리 등 기초과학을 바탕으로 한 기반 나노 기술 분야에 강점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는 우리나라의 과학기술부에 해당하는 산업과학부를 중심으로 연구개발 지원 정책을 펴고 있다.
산업과학부는 표면 과학(surface science)과 나노화학(nanochemistry) 등 2개의 나노 과학분야에 국책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바이오 분야의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 투자하고 있다. 러시아는 성공 확률이 10%에 미치지 않는 창의적 연구 분야 및 신소재 분야의 과제들도 지원하고 있다.
이들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2년 단위로 지원이 이뤄지며 과제 평가 결과에 따라 계속 지원할 수 있는 형태다. 러시아는 특이하게도 교육부에서는 대학이나 연구기관에 어떤 연구과제나 자금을 지원하지 않는다.
극심한 재정난으로 과학기술분야 투자에 미진한 러시아지만 정부는 지난해부터 2006년까지 새로운 나노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등 나노기술에 대한 투자를 이어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고체 소자 나노구조 물리학을 포함해 양자와 비선형 프로세스 등 기초 기반 기술에 집중되고 있다.
◇주변국과 공동연구=푸틴 대통령은 물론 러시아의 고위 관료들은 과학 분야에 대한 재정 확대를 역설하고 있지만 이를 실천에 옮기는 데 있어서는 별로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자 러시아 나노기술 연구자들은 국내의 부족한 연구비용을 주변국과 공동 연구를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해결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러시아 과학자는 유럽연합(EU)과 나노기술 분야 연구개발 공동 협력을 하고 있다. 또 평화를 위한 북대서양조약기구(나노·NATO)와 UN프로그램 등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나노 물리학에서 세계 선두권을 유지하고 있는 러시아 과학자들은 외국 연구소와 기업으로부터 공동 연구 및 지원금을 받아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미국 아르곤에 위치한 이론 재료 공학 연구소가 내놓은 글로벌 나노구조 연구 프로그램(Nano structure research global program)에 러시아 연구 센터의 참여가 제안됐다.
러시아 과학자들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데 대해 러시아가 결코 과학 발전에 뒤쳐져 있는 국가들의 반열에 속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한 사건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특히 이 프로그램은 러시아에서 이주한 과학자인 발레리 비로쿠르가 이끌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는 니즈니노보고로드의 러시아 학술원 산하 미세 구조 물리학 연구소, 상트 페테르스부르그의 F.A.요페 물리-공학 대학의 연구진도 참여한다. 이 프로그램의 조직위원회는 공동 연구 첫해를 결산하고 러시아에서 재능 있는 과학자를 초빙하기 위해 상트 페테르스부르그에서 학회를 여는 등 나노 분야의 러시아 과학자 유치에 열을 올렸다.
◆러시아 연구계
러시아는 나노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소재 관련 전담 연구소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총 56개 국가연구센터 중 현재 소재분야 전담 연구소는 9개며 관련이 있는 센터까지 합하면 모두 16개 센터에 이른다. 이는 총 국가연구센터 수의 약 29%에 해당하는 수치다.
소재분야는 구소련 시절 미국과의 군비경쟁시 러시아가 서방과 격리된 상태에서 독립적으로 발전시킨 분야 중 하나다. 러시아가 그동안 기초물리, 고체물리, 물리화학, 결정학, 화학 등 소재관련 기초학문 발전에 쏟은 노력은 소재분야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신소재나 물질 창조에 필수적인 물질구조 규명이나 특성분석 등에 대한 많은 연구와 노하우 등 관련 연구개발체계의 확립은 △응용소재는 물론 △방위산업분야와 관련된 전투기용 경량 합금 △초고속 항공엔진용 내열 합금 △방탄용 소재 △우주선용 복합재료 등 특수 소재의 개발과 생산까지 가능케 했다.
이러한 주요 소재들은 국가안보와 직결되고 있었기 때문에 전략상 대외의존도를 가능한 낮추고 자체적으로 개발하여 그 기술을 확보해야 했다.
구 소련시절 군사비밀도시로 분류되었던 첨단 전자단지 젤라노그라드시에서는 일반인들의 인식과는 달리 첨단 전자재료에 대한 연구개발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러시아는 멘델레프의 주기율표상에 나오는 기초원소들에 대한 분리·정제 등 범용소재 개발기술에서부터 이를 바탕으로 한 응용소재나 첨단소재의 개발능력까지 갖춘 나라다.
러시아 과학자들은 구소련 시절부터 이론 물리학과 미세 구조 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 러시아의 기초 과학 분야가 선진적인 입지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세계적인 학술 잡지인 ‘레드 헤링’지에 ‘올해의 하이테크 분야의 최우수 연구물 톱 10’ 리스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리스트에는 니즈니 노브고로드 출신의 43세의 과학자인 올렉 수이틴의 발견이 포함돼 있다. 그는 나노 기술과 원자 분자분야가 컴퓨터 기술에 미칠 영향을 연구했다. 그가 개발한 기술은 원자 수준에서 작동하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는 차세대 컴퓨터를 개발하는 기초가 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올렉 수이틴을 중심으로 활발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는 연구소는 미국의 인텔사와 공동 연구를 수행하고 있기도 하는 등 그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화학물리 RAS연구소와 까르포프 물리-화학 연구 과학 연구소 공동 연구진은 얼마 전 나노 분말 에너지 재료를 만들어내 세계 과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연구진은 1∼100나노미터(nm) 크기의 입자인 폭발물 합성 방법을 개발했다.
이 재료는 폭발물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것은 물론 평화적인 목적으로 에너지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로켓용 고체 원료나 광산업에서 활용할 수 있다. 화재 진압용 폭발 성분이나 순수한 가스를 얻기 위해서 고체 타입의 이 물질이 조금만 있어도 산소나 질소와 같은 필요한 가스를 다량으로 만들 수 있다.
(자료협조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나노정보분석실)
<김인순기자 insoo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