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중소 휴대폰업체가 금융권의 무차별적인 자금 회수로 경영 압박이 가중되고 있다. 특히 하반기 수출 오더를 확보한 채 원자재 구입에 나서고 있는 기업들도 금융권의 획일적 대처로 발만 구르고 있다.
이같은 금융권의 무차별적 조치는 수출효자 상품이자 국가 전략산업인 휴대폰업계의 성장 동력 상실로 이어질 수도 있어 업계와 정부가 참여하는 민간대책위 등을 구성해 옥석을 가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무차별적 자금 회수=중견 휴대폰업체인 A사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 1분기까지 차입금 상황에만 연 매출(3400억원)의 3분의 1에 육박하는 1000억원 가량이 들어갔다. 이 자금은 본사 건물을 매각하고 구조조정을 통해 가까스로 마련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자구노력을 통해 부채비율을 1년만에 400%에서 200% 이하로 낮추었는데도 금융권은 만족하지 못했다”며 “(금융권이)신규 대출은 커녕 자금만 회수하는 바람에 경영만 한층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세원텔레콤이 최근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금융권의 대출금 회수는 속도를 더하고 있다. 중견 업체 B사의 고위관계자는 “최근 일부 중견·중소 중견업체가 잇따라 부도를 내면서 금융권의 분위기가 더욱 싸늘해졌다”며 “금융권이 옥석을 가리지 않고 일단 돈부터 회수하고 보자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고 전했다.
신규 대출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동안 관행적으로 1년 상환을 조건으로 은행에서 자금을 끌어다 썼으나, 최근에는 2∼3개월내 초단기 상환을 전제해야만 대출이 가능해졌다. 중소업체인 C사의 재무담당 임원은 “이제는 1개월 후 전액 상환을 조건으로 해야 은행에서 돈을 빌릴 형편”이라며 “이마저도 어려워 사채 시장을 기웃거리는 기업도 있다”고 말했다.
◇종잣돈마저 대출 상환금으로=상황이 이렇다보니 중견·중소 휴대폰업체들은 수출 계약을 체결하고도 자재 구매 대금을 마련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실정이다. A사 관계자는 “하반기에 미국과 중남미에 대규모로 휴대폰을 공급해야 하지만, 부품 구매 자금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매출을 올리는 족족 은행권에 돈을 갚느라 하반기 사업을 위한 자금을 준비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정부 정책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DJ 정부때는 중견·중소업체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됐지만, 현 정부는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에만 매달려 중소기업 육성책을 내놓지 못한다”며 “국가 전략 산업인 휴대폰 기업들이 이 모양인데 다른 중소기업은 보나마나 뻔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민관 참여 대책위원회 구성해야”=업계는 금융권과 정부가 참여하는 ‘기업자금상환조정위원회’의 설립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조정위원회를 통해 정부와 금융권이 부실 기업은 하루 빨리 자금 회수를 통해 시장에서 퇴출시키더라도 경쟁력을 갖춘 업체에는 회생 자금을 지원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B사 사장은 “모든 중견·중소업체가 망해야 할 만큼 휴대폰 시장이 나쁜 게 아니며 일시적 유동성 위기만 벗어나면 소생할 수 있는 업체들이 상당수 있다”며 “정부와 금융권은 자금이 선순환될 수 있도록 길을 터줘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익종기자 ij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