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2001년 3월 한게임 유료화 서비스 발표 기자간담회. 3월 날씨답지 않은 폭설이 내려 참석률마저 저조했지만, 이사하는 날 눈이나 비가 많이 오면 잘 산다는 말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2000년 겨울은 계속되는 인터넷 거품 논쟁으로 가장 혹독한 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투자심리는 꽁꽁 얼어붙고, 직원들의 사기저하와 전반적인 분위기 침체로 종착점은 멀어 보이기만 했다. 당시 재무 상황은 그대로라면 향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막막했다. 유일한 카드는‘유료화’밖에 없어 보였다. 그러나 유료화는 언제나 이용자 감소라는 불가피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니만큼 그 여부를 당장 결정할 수는 없었다.
우선 유료화 시기 결정에 앞서 사전 준비의 필요성을 느꼈다. 김정호 부사장을 위시한 네이버쪽의 핵심 경영진을 게임 분야에 전격 투입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전담팀(TFT)을 구성, 빌링 인프라 및 빌링 사이트 구축에 들어갔다. 당장 눈 앞에 놓인 사이트 운영이 시급했던 상황에서 이러한 인사 배치는 가히 파격적이었다. 유료화 준비 작업도 힘들었지만 설상가상으로 사전에 유료화 방침이 새나가면서 사이트는 반대하는 회원들로 폭발할 지경이었다. 연일 게시판을 도배하는 회원들의 반대 글들을 보며 직원들도 유료화에 대한 강한 거부 반응을 나타냈다. 인터넷 서비스 유료화에 대한 선례가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혹시라도 실패하면 그동안 닦아놓은 기반을 모두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CEO의 직감일까. 성공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었다. 숫적으로도 당시 1000만 명이 넘는 한게임 회원 중 1%만 유료서비스를 이용해도 수익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몇달 일찍 아바타 판매에 나선 네오위즈의 선전에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한게임 모델은 콘텐츠에 대한 직접 유료화가 아닌 부가 서비스에 대한 유료화였다. 게임을 무료로 즐길 수 있지만 좀 더 편하고 즐겁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우등고속버스’ 개념이어서 이용자 불만도 크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유료화를 단행키로 최종 결정하고 직원들에게 유료화의 당위성, 성공에 대한 확신, 향후 계획 등을 차근히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처음에 반대하던 직원들도 하나 둘씩 내 뜻을 따라줬다. 2001년 3월, 6개월간 준비한 유료 서비스를 선보였다. 지금도 생생하게 그날 기자간담회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사상 최대의 폭설이 내려, 참석률도 좋지 않았다. 비나 눈이 오는 날 이사하면 잘 산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행사 후 차를 버려둔 채 산만한 눈을 머리에 이고 사무실로 걸어오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유료화 첫날 1억원 가까운 놀라운 매출을 올렸고, 한달 만에 7억원을 기록하는 폭발적 성과를 거뒀다. 지금도 당시 그 순간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로 유료화의 성공은 나에게 가장 감동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유료화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NHN은 2001년 6월 네이버 검색서비스 유료화를 개시, 또한번 탄탄한 수익모델 발굴에 성공했다. 이는 업계에 유료화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 인터넷 거품 논쟁을 잠재웠음은 물론 현재 NHN의 높은 수익율과 기록적인 성장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2000년 겨울. 가장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보람을 느낀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