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무는 다단계 유통 컴퓨팅업계 골병 든다

IT시장에 만연해 있는 다단계 유통의 실체가 하나 둘씩 드러나면서 이제부터라도 잘못된 관행을 고쳐야 한다는 움직임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2002년 교육행정정보화시스템(NEIS) 구축 전산장비 납품과 관련, 대형SI업체인 S사가 협력사인 I사에 물품 대금 20억원을 지급하라는 판결를 내렸다. 매출확대를 위해 장부상으로만 계약당사자로 기재하고 마진만 챙겼지만 협력업체에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이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컴퓨팅 유통 시장에 만연해 있는 끼어들기를 통한 다단계 유통 문제가 표면화됐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실제 이론상으로는 수요처가 제품을 구매할 때 공급업체(벤더)로부터 직접 받거나 벤더와 제품 공급 계약을 하고 있는 파트너사 1, 2개를 통한 유통과정을 거치면 된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유통 과정에 SI 업체나 혹은 수요처와 특정 관계를 맺고 있는 제 3의 업체가 끼는 것이 일반적인 상행위로 받아들여진 지 오래다. 벤더들은 이제 유통 과정을 10단계 이내로 줄이느냐 마느냐를 놓고 골머리를 썩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이번 사건에서도 드러났듯 끼어들기를 통한 다단계 유통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만일의 하나 부도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피해 기업이 늘어나 그야말로 유통 대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금 결제가 3개월 이상, 또 어음으로 행해지는 국내 현실에서 이 같은 우려는 더욱 크다.

 이번 NEIS 장비 납품을 둘러싼 건과 동일한 사건은 주변에 널려 있다. 지난해 지역 공공기관에 제품을 납품한 A사는 수요처의 요구로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유통업을 행해온 B 업체를 끼워넣을 수밖에 없었다. 수요처가 물품대금을 B사에 지급했지만 A사는 아직까지 B사로부터 대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 B사가 다시 끼워넣은 C업체가 부도가 났다는 게 이유였다.

 이처럼 다단계 유통 과정엔 대부분 대기업이나 유관기업의 힘의 논리가 작용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즉 수요처는 물론이고 계열사와 같은 ‘대형 수요처’를 쥐고 있는 SI사나 특정 업체들이 끼워넣기를 요구할 때 거절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이들이 마진까지 챙겨도 그야말로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아예 대기업 수요를 등에 업고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가격 경쟁이나 업체들 줄 세우기도 서슴치 않고 있다고 업체들은 토로한다.

 그렇지만 그동안 수면 하에서 쉬쉬하며 이루어져왔던 다단계 유통에 대한 반발이 하나 둘씩 바깥으로 터져나오고 있다.

 국내 대형 IT 기업인 P사는 지난해 말 국내 대형 서버 업체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도 지금까지 대금을 지급받지 못하고 있다. 해당 서버 업체 내부 감사에서 “도대체 P사의 역할이 무엇이냐”며 대금 지급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P사는 외부로 알리기조차 부끄러운 사실이라 아직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납품비리라는 일대 내홍을 겪은 한국IBM은 지난 상황이 발생하게 된 근본 이유를 ‘밀어내기’와 ‘다단계 유통’으로 보고 아예 편법유통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2∼3단계 이상의 유통 과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겠다는 것이다. 다단계 유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한국IBM과 직접 거래를 하는 총판에 대해 분기별 감사를 정례화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특히 특별 할인 가격으로 제품을 구매한 파트너사들에 대해서는 부정기적 돌발 감사를 실시, 1회 적발에도 파트너 자격을 박탈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최근 한국IBM 협력업체로 새롭게 선정된 업체의 한 관계자는 “서류 몇장 꾸며 매출을 올리려는 기업들의 잘못된 관행을 뿌리 뽑을 때가 됐다”며 “다단계 유통은 대기업들의 끼어들기 외에도 벤더가 밀어내기를 조장하면서 확산되는 만큼 벤더 스스로 밀어내기를 금하는 엄격한 기준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형 서버 업체 한 관계자는 “일부 수요처에서는 하드웨어 구매시 SI를 통하지 않고 별도로 구매하기도 하는데 이럴 경우는 유통 과정을 최소화할 수 있다”며 “수요처나 조달청에서 납품 경로를 제한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견해를 제시했다.

 <신혜선기자 shinhs@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