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1985년 3월 3일 조세의 날 금융실명제에 기여한 공로로 필자가 철탑산업훈장을 받고 있다.
1982년 장영자·이철희 사건으로부터 정치적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7·3 조치가 발표됐다. 금융실명제로 명명된 7·3 조치의 취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가명 또는 무기명 금융거래는 떳떳하지 못한 자금의 은둔처를 제공하게 되며 부조리의 은닉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 둘째, 종합소득세제를 실시할 수 없으므로 거액의 금융자산이 분산되어 분리과세 되는 반면 사업소득과 근로소득은 상대적으로 고율로 과세됨으로써 소득세제의 형평성이 결여돼 있다. 셋째, 가명 또는 무기명 예금이 투기자금으로 활용되면 장영자·이철희 사건과 같이 실물경제의 교란이 재발하게 된다.
7.3 조치가 있었던 이틀 후인 7월 5일 재무부 장관 주재로 금융실명제 실시를 위한 대책회의가 소집됐다. 재무부 대회의실에 우리나라 금융계(은행, 보험, 증권, 종합금융, 농협, 수협)의 대표들이 모두 집합했다. 긴급히 발표된 정치적 조치의 실시 방안에 대해 대책회의에서 난상토의가 진행되다가 결국은 금융실명제의 기술적 해결방안에 대한 짐이 SERI에 부과됐다. SERI는 온 나라를 들끓게 하는 정치적 이슈에 기술 판정관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당시 정부로서는 정책결정 시한이 2주일 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나는 정부에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SERI의 기술분석을 위해 2주일의 기간 중 10일을 할애할 것. 둘째, 이 기간 동안 SERI에 전 금융기관에 대한 자료제출 요구 및 현장 확인 권한을 부여할 것. 셋째,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정부차원의 태스크포스 팀을 구성해 줄 것 등이었다. 이 세 조건은 재무부에 의해 즉각 받아 들여졌다.
금융실명제 기획조정위원회가 이진설(위원장, 당시 재무부 2차관보) 이단형(간사, 당시 SERI 선임연구원) 강현욱(위원, 당시 이재국장) 안공혁(위원, 당시 증권보험국장) 백원구(위원, 당시 세제국장) 양창환(위원, 당시 국세청 직세국장) 이상혁(위원, 당시 국세청 자료국장)으로 구성돼 즉시 가동됐다.
나는 사안의 심각성과 파급효과를 감안하여 전 금융창구 실무자·중간관리자·금융기관장을 모두 참여시켜서 돈의 흐름에 대한 확인 검증이 이뤄지도록 조치했다. 또 기초자료에 대한 시비를 차단시키고 일주일내에 당시 우리나라 돈의 흐름을 정량화 시켰으며, 약속대로 10일 이내에 금융실명제 실시를 위한 기술적 로드맵을 제시했다.
이는 1984년부터 1989년까지 5년 동안 국세청이 은닉세수 2조5000억 원을 발굴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1993년 문민정부에서 본격적인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는 토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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