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에서 나오는 폐기물은 모두가 감염성?”
국내 연구소·대학 및 기업들이 정부의 융통성 없는 폐기물 관련 법적용 및 집행으로 인해 연간 수백억원대의 국가 과학기술 R&D 예산을 불필요한 폐기물 처리비용으로 낭비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벤처업체는 지나치게 엄격한 정부의 법 적용으로 인해 수년간 수십억원의 예산을 들여 구축한 세계적인 과학기술 인프라를 폐기처분해야 할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하소연할 정도다.
11일 국내 산·학·연 관련 기관에 따르면 한국생명공학연구원과 한국과학기술원 등이 환경부의 지나치게 엄격한 ‘감염성 폐기물 관리 법’으로 인해 연간 수억원의 R&D 예산을 폐기물 관리에 충당하고 있다.
◇종이커피잔도 감염성 폐기물=환경부의 ‘감염성 폐기물 관리법’ 2조 4의 2조항은 ‘지정 폐기물 중 의료기관이나 시험·검사 기관 등에서 배출되는 인체에 위해를 줄 수 있는 물질’을 감염성 폐기물로 간주, 관련 폐기물 업체에서 수거해 처리토록 하고 있다.
하지만 관련 산·학·연에서는 이 같은 환경부의 법집행에 대해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적용되고 있어 인체에 무해한 쓰레기조차도 일반 쓰레기에 비해 10배가 넘는 비용을 써야 하는 감염성 폐기물로 처리하게 돼 막대한 R&D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실제로 실험실에서 연구원들이 마신 커피 용기를 비롯해 연습장, 식물 배양용기, 증류수를 담은 튜브 등은 인체에 전혀 해롭지 않아 일반 쓰레기로 처리가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단지 의료·시험·검사 기관 등에서 배출하는 물질이라는 이유로 감염성 폐기물로 처리해야 하는 실정”이라는 게 이들 연구원의 주장이다.
◇생명연구계 초비상=생명공학 관련 정부출연연구기관인 생명연은 지난해 상반기 실험실에서 나오는 플라스틱배양용기 등 관련 폐기물들을 감염성 폐기물로 처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합동 단속반에 적발돼 기관장이 검찰에 고발되는 사태까지 갔으나 관련 학계의 호소에 따라 다행히 기소유예되는 선에서 그쳤다.
하지만 이후 지금까지 생명공학관련 연구소들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어 1년여 동안 3억∼4억원에 달하는 R&D 예산을 들여 감염성 폐기물 처리 비용에 충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생명연 허광래 박사는 “정부의 법대로라면 실험실에서 용기를 다룬 연구원들조차도 감염성 폐기물로 처리해야 하지 않느냐는 연구원들의 자조섞인 얘기가 나오고 있다”며 “두리뭉실하게 돼 있는 법 규정에 합리적인 세부 규칙을 만들어 R&D 예산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KAIST도 최근 초비상에 걸렸다. 얼마 전 분리수거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 환경신문에 기사가 게재된 이후 생명연과 같은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퍼져 바이오시스템학과와 생명과학과, 생명과학공학과 등 관련 학과들이 인체에 유해하지 않은 쓰레기조차도 서둘러 분리수거하고 있다.
최준호 생명과학과장은 “현재로서는 악법도 법이니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며 “자칫 이 문제로 총장이 검찰에 고발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서 학교 기획처장을 설득해 폐기물 처리 비용을 따로 요청해 놓은 상태”라고 말했다.
◇세계적 연구성과 폐기위기에=KAIST 교수 창업 벤처인 제넥셀도 정부의 이 같은 법 적용으로 인해 지난 수년간 60억원의 예산을 투자해 게놈 연구를 위해 구축한 세계 최대 규모의 ‘초파리 라이브러리’를 막대한 폐기물 처리 비용 때문에 폐기해야 할 위기에 처해 있다.
김재섭 교수는 “미국 블루밍턴 국제 초파리 스탁센터와 하워드휴즈 의학연구소, 위스콘신 의과대학 등에서조차도 초파리 사체와 배양 용기는 일반 생활 쓰레기로 취급해 배출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만 감염성 폐기물 처리를 고집하고 있다”며 “국내 과학기술 인프라 보호 측면에서라도 관련 법령이 합리적으로 개선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서울대 정진하 생명과학부 학과장도 “단지 실험실에서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감염성 폐기물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라며 “세부적인 지침과 규정을 만들어 아까운 예산을 낭비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라고 관련 법 개정 등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와 관련, 환경부 관계자는 “의사협회나 시민단체 등 관련 기관들이 각각 자기네 입장에서 법이 잘못됐다고 하는데 무조건 다 들어줄 수 없는 입장”이라며 “현재로서는 법 개정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대전=신선미기자@전자신문, sm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