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서정욱 前국방과학연구소장(왼쪽)이 1974년 연구원들과 원방 조정기 및 차량용 무전기를 개발하고 있는 모습.
(2)방위산업 직접 육성 결심
국산 차량 무전기와 휴대 무전기를 평가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덕분에 국내 연구소와 업체의 능력, 군 조달제도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인력자원의 부재, 기술정보의 부족, 산업기반의 취약, 조달계통의 부실 등 이러한 환경에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반문하며 업체와 연구소를 탓하기보다는 이들을 반면교사로 생각했다. 그래서 선진국의 물자획득 연구개발체계를 조사하고 연구했다. 여기서 얻은 지식과 정보로 연구개발조직을 편성하고 사업을 계획했다.
이를테면, 인력자원은 기술정보, 규격작성, 설계제작, 부품확보, 생산대책, 품질보증, 자체시험, 부대시험, 종합평가, 원가계산 등으로 특무(Task force)화 하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지는 순기관리(Life-cycle management)로 연구개발사업을 추진했다.
나는 현장중심경영(MBWA)을 강령으로 업무를 추진했다. 국방과학기술자로서 연구개발사업에 성공하려면 군사교리를 이해하고, 물자를 요구-획득-운용하는 전장의 장병과 대화를 해야 하며 또한 우군은 물론 적군의 무기체계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축적해야 했다. 군부대를 찾아 장병의 요구를 경청하고, 새로운 군사과학기술을 소개할 필요성도 있었다. 내가 연구개발한 장비물자의 하자를 스스로 찾아내곤 했다. 이것이 고객(군)을 만족시키고 자신을 발전시키는 길이었다.
한 때 탈모 비누가 군 조달의 비리로 부각된 일이 있었다. 사실은 야전 전화선, 야전 전화기, 전지 등도 국산화해 조달은 했지만 성능이 미달하고 품질이 열악해 군은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는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만들어진 차량 무전기나 휴대 무전기, 이미 존재하는 연구소나 업체를 놓고 입씨름을 하기보다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국방물자의 연구개발 및 생산조달 체계를 행동으로 쇄신하자는 것이다. 국방과학연구소가 최신의 과학기술, 시험평가, 품질보증, 경영철학, 관리기법으로 연구개발사업을 추진하고, 방위산업을 육성한다는 결심이다.
그러나 방위산업의 육성은 쉽지 않았다. 불량한 국산품에 시달린 군은 국산개발보다는 미군이 통신장비를 신형으로 교체할 때 생기는 구형 통신장비를 재생하여 인수한다는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군용무전기의 국산개발은 말도 꺼내지 말자는 군 고위층이 있는가 하면, 군 출신 영세업체가 미군통신장비를 모조해 납품하기도 하고, 대기업이 일본 방위청 무전기의 면허 조립생산을 건의하고 있었다.
방위산업은 국가안보를 위해 필수적이며, 첨단산업 및 고급인력을 개발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내 임무는 주로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었지만, 부품소재도 중시해야 했다. 그것은 중소기업을 육성하고, 연구 개발자에게 설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다. 독창적 시스템을 개발하려면 첨단 부품소재 산업이 뒷받침해야 됐다. 그리고 방위산업에 종사하던 과학기술자는 결국 민생산업 각 부문에서 활약하게 된다. 또한 고신뢰성 다층 PCB, 하이브릿 IC 등 군용부품을 국산화했더니 결국 민생 교환기 부품으로 대량생산을 하게 되며, 가격 경쟁력이 생겨 수출까지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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