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982년 7월 미국 국방성 체계분석 연구소장 일행이 ADD를 내방했을 당시, 필자(가운데)가 연구소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4)박정희 前대통령이 친 무전
천신만고 끝에 KPRC-6를 개발하고 나니 부대시험을 할 길이 없었다. 번개사업 품목에 없던 개발품이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마침 우리 연구실 자문위원으로 해병대 이재규 중령이 있었는데 KPRC-6 개발에 관심이 많았다. 1972년 4월 이 중령이 찾아와 “KPRC-6을 한미 합동 상륙훈련에 투입해보자”고 제의했다. 군사규격에 따라 연구개발 시험평가는 했으나 야전운용 부대시험을 하자니 한편 겁도 났다. 망신 당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었지만, 부대시험은 꼭 해야 하므로 4대를 해병대에 보냈다. 대신 누가 개발했다는 것은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두 달쯤 후에 이 중령은 보고서와 함께 KPRC-6 4대를 들고 왔다. 미 해병대와 교신이 잘돼 우리 해병대 통신병들이 신이 났고, 외국제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쓰고 있던 군원품 A/N PRC-6은 낡아서 사실 무전기 없이 훈련을 해온 셈이었다. 그러니 KPRC-6을 써보고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부대시험 보고서에는 개선사항이 낱낱이 지적되어 생산때 큰 도움이 되었다.
하루는 오원철 청와대 수석비서가 불러 청와대에 들어갔다. “KPRC-6은 왜 보고를 하지 않았소”라고 물어와, “아직 완성이 안돼서…”라고 얼버무렸다. 번개사업도 아닌 KPRC-6를 청와대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다. 출처불명(?)의 무전기를 우리 해병대가 쓰고 있는 것을 보고 누군가 보고한 것이라 짐작했다.
1972년 7월 어느 날. 점심시간이 가까울 무렵 오 수석의 전화를 받았다. KPRC-6을 가지고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잠시 후 다시 전화가 오더니 들어오지 말고 무전기를 켜놓고 있으라고 말했다. 무전기를 켜놓고 있는데 잡음이 가라앉더니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ADD 나오시오.”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얼떨결에 나는 “ADD 서정욱입니다…”라고 말했다.“잘 들리는군, 수고가 많았소.”
“감사합니다…”“애로사항이 있으면 말 하시오.” 이때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KPRC-6은 정식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연구비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후 오 수석을 만나니 “그런 얘기는 나한테 해야지, 어른께 말씀드리면 어떻게 하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 수석의 표정은 언짢은 것은 아니었다.간단한 통화였지만 박 대통령의 대관세찰(大觀細察)에 우리는 감명을 받았다. 그냥 “수고가 많았소”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연구에 열중한 과학기술자에게 앞길을 터 주려는 것이었다.
과학기술자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의 격려를 받고 감격하다 기회를 놓쳤다면 KPRC-6은 햇볕도 못보고 음지의 해프닝으로 끝났을 것이다. 대통령과의 통화로 KPRC-6은 정식 연구개발사업이 됐고, 연구인력·장비·과제 등 ADD의 통신전자 연구개발기능이 확충됐다.
포병 출신인 박 전 대통령은 통신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모 연구소가 개발한 휴대 무전기와 모 업체가 납품한 국산 무전기를 보고 몹시 실망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번개사업에 통신장비품은 빠져있었던 게 아닌가. 그러나 KPRC-6 때문에 한국의 방위산업은 통신전자 부문에서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고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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