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서정욱 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 이사장(5)

(5)軍통신장비 국산화 급물살

음지에서 개발한 분대용 무전기(KPRC-6)가 햇빛을 보니, 할 일이 없던 나에게 일복이 터졌다. 국산개발에 회의적이던 군이 중·소대용 무전기(PRC-77)를 비롯, FM무전기(VRC-12), SSB무전기(GRC-42), VHF/UHF 다중무선통신장치(GRC-103), 사격통제레이더(VPS-2), 피아식별기(APX-72) 등을 국산화 계획에 반영하기로 했다. 또 포병용 계산기, 공병용 지뢰탐지기, 땅굴 탐지기까지 개발을 요청해 왔다. 그리고 야전전화기(TA-1, TA-312)와 야전교환기(SB-22, SB-86)업체에 국방과학연구소(ADD)의 품질보증을 적용하라고 요구했다. 물론 업체들은 반발했다. 납품한 전화기를 헌 미군전화기와 함께 업체들이 보는 앞에서 낙하시험을 했다. 헌 전화기말고 납품한 전화기들은 조각이 났다. 모두 조용히 돌아갔다.

분대용 무전기 자체개발에 이어 소·중대용 무전기 공동생산을 미국에 타진했다. 어림도 없다는 반응이었다. 분대용 무전기를 군사규격대로 개발한 실적을 내세워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아보자는 선까지 미국을 설득했다. 전문가들은 KPRC-6의 규격, 연구개발일지, 시험평가자료, 부품확보대책 등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상용 자동시험장치가 없어 온도, 습도, 낙하, 진동, 충격, 침수, 염수분무(鹽水噴霧) 등 군사규격이 요구하는 시험을 자작한 장치로 해냈다. 수용함(收容函)은 자동차 피스톤을 녹여 샌드캐스팅해 절삭 가공한 것임을 보여주었다. 수동으로 하다 보면 “규격보다 가혹한 시험이 될 수도 있다”며 놀라워 했다.

몇 달 후 희소식이 왔다. ADD가 사업을 관리하고 품질보증까지 책임지는 조건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는 군용 통신장비품을 생산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지만 나는 고생문에 들어섰다. 국내외업체들과의 계약, 생산, 납품 등 가격협상에서 교육훈련까지 순기개념의 사업관리를 시작했다. 당시 육군연구발전사령부와 국방조달본부가 있었지만, 첨단 통신장비품의 생산사업은 ADD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당면한 군의 요구를 충족하면서 미래의 전쟁은 전자전(電子戰)임을 인식시켜 대비할 것을 나는 군에 건의했다. 각 군 대학, 사관학교에 전자전 과목을 신설 또는 확충할 것을 권고하며 직접 특강을 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이라는 말이 있듯이 국방연구개발에는 적성무기 정보가 필수적이다. 이를 수집하기 위해 나는 세계각지를 돌아다녔다. 군의 지휘, 통제, 통신, 컴퓨터, 정보(C4I) 및 전자전 시스템 개발, 교리개발, 교육훈련에 필요한 기술지원도 했다. 당시 해군은 소련의 레이더 유도미사일(Styx)로 무장한 오사코마 고속정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전자전이란 적의 전자파(電磁波) 이용을 탐지해서 역이용, 억제, 저지하고, 우군의 전자파 이용을 보장하기 위해 전자파를 이용하는 군사행동이다. 적을 먼저 발견하여 기만, 방해, 파괴할 수 있는 전자전 능력이 우월해야 전쟁에서 승리한다. 나는 1970년대에 전자전 연구로서 대역확산(Spread Spectrum) 기술을 개발한 일이 있다. 1990년대에 같은 기술을 응용한 CDMA이동전화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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