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서정욱 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 이사장(6)

6)인맥도 국방과학자의 덕목

1970년 국방과학연구소(ADD) 창설에 참가해 83년 ADD를 떠날 때까지의 생활은 시련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국방과학기술이 전무했던 한국에 선진 연구개발 체제를 도입해 연구원들의 의식구조와 행동양식에 융합함으로써, 군·산·연이 삼위일체가 되도록 힘썼다. 남북이 대치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한·미 안보회의 기술협력위원회 공동의장으로서 군사외교에도 관여했다.

국방과학기술자로서 성공하려면 정보능력을 갖춰야 한다. 특히 생산업체 선정에는 공개정보뿐만 아니라, 인맥을 통한 비공개정보까지 동원해야 한다. 이를테면 PRC-77은 유명한 미국의 RCA가 개발했지만 양산에 성공한 것은 무명의 미국업체인 멤코어이다. GRC-103 생산의 경우 역시 미국의 매그나복스는 실패하고 캐나다의 마코니가 성공했다. 오히려 무명의 멤코어와 마코니를 선정했기 때문에 사업의 실패를 모면했다. 이러한 정보는 공개되지 않아 인맥을 통해 얻어내야 했다.

국방연구개발에 부품업체들의 협력은 절대적이다. 시스템을 개발하려면 수정진동자, 저항소자, 용량소자, 인쇄회로기판(PCB), 하이브리드 IC 등 높은 신뢰도를 요구하는 전자부품을 국산화해야 했다. 대덕전자는 인쇄회로기판, 일신동양은 수정발진자, 금성전기는 하이브리드 IC를 개발해 국방연구개발에 기여했고, 이후에 전자교환기의 국산화 및 부품 수출에 기여했다.

대학, 연구소, 업체의 연구진도 활용했다. 이들은 델타변조다중화, 대역확산-주파수도약, 지능안테나, 광대역전파탐지, 반도체 마이크로파 전력증폭기, 비금속지뢰탐지, 전장(戰場)센서, 한글 무선텔레타이프, 포병용 컴퓨터 등 위탁 연구를 수행하고 ADD는 결과를 전수받아 실용화한 것도 있다.

국방연구개발에는 인맥이 중요한데 미국 육군 전자통신연구소와 같은 곳의 교환연구원 생활은 연구능력은 물론 인맥을 확충하는 기회였다. 내 인맥 중에 일본 방위청 기술연구본부장 호리 야스시 박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2차대전 때 일본의 산소어뢰를 개발한 병기전문 과학기술자다. 그와 나눈 대화 속에 나는 교훈과 용기를 얻었다. 군사 규격 및 표준의 수준을 놓고 고민하고 있던 터에 그는 “절대로 군사 표준 및 규격의 수준을 낮추지 마라. 일본 방위청도 낮췄다가 낭패했고, 연구개발에 차질이 생겨 미군 군사 규격 및 표준으로 환원했다”고 일러줬다. 매사에 목표 수준을 낮추면 발전을 할 수 없다는 충고와 교훈이었다. 내가 연구개발, 시험평가, 품질보증 활동을 하면서 온갖 역경과 시련을 극복한 것도 이러한 교훈과 용기 때문인지 모른다.

70년대에 ADD에서 축적한 군용통신장비물자 개발의 경험은 80년대 TDX와 TICOM, 90년대 CDMA 등 민생 통신장비물자 개발에 적용하는 새로운 도전을 맞이했다. 어떻게 보면 국방물자 연구개발을 위해 개발한 인력자원을 민생물자 연구개발을 위해 동원한 셈이 된다.

ADD에 있을 당시 나를 믿고 일을 맡겨준 국가, 성원해준 국내외 인맥, 내 결단을 믿고 따라준 연구소와 업체의 젊은 영웅들에게 경의와 찬사를 보낸다. 특히 군의 이해와 협조는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과학기술정신을 고양했으며, 일하는 보람을 안겨줬다.

juseo@kita.net

※필자 개인 사정으로 연재를 잠시 중단하고 내달 말께 7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넓은 아량과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