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방법원이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를 통과한 아케이드 게임을 제공한 업소를 처벌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다. 한마디로 ‘영등위 심의를 마친 게임은 당연히 서비스된다’라는 그동안의 통념을 깬 것이다.
법원은 이번에 영등위에서 심의등급을 받은 A게임을 제공한 B업소에 대해 ‘음반 비디오물 및 게임물에 관한 법률’과 사행행위 등의 규제 및 처벌특례위반을 들어 벌금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B업소가 게임 누적점수에 따라 상품권을 지급하고 이를 지정 환전상에게 환전을 유도하는 등 사행심을 유발할 우려가 있는 게임기를 이용해 이득을 취했다며 유죄 판결 이유를 밝혔다.
게다가 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영등위를 사행성 여부를 판단하는 공식 기구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영등위의 결정이 법원의 판단을 구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 파문이 예상된다.
◇영등위 무용론 대두=한 게임업체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영등위라는 기구 자체의 무용론까지 거론될 수 있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영등위의 역할은 연령 가이드 라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확대해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컴퓨터게임산업중앙회 관계자는 “이번 사건에서 해당 게임이 사행성 기구냐 아니냐는 두 번째 문제”라면서 “영등위의 심의등급이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한다면 영등위 존립 근거가 없어진다는 게 문제”라고 진단했다. 또 다른 관계자들은 “영등위 기준이 문제라면 기준 자체를 문제삼아야지 영등위 기준에 따라 게임을 개발하는 업체나 업소를 문제삼는 것은 다른 문제”라며 “사행성의 정확한 판단 기준은 무엇이고 최종 판단을 내리는 곳은 어디인지 명확하게 해두지 않는다면 영등위 기준은 백번 정해도 소용없게 된다”고 반발했다.
이에 대해 영등위 측은 “이번 판결은 사행성 행위 유무를 따지는 관련 법 규제에 따른 것으로 등급을 판정하는 영등위의 심의기능과는 별개의 건”이라면서 “판례를 보더라도 영등위를 통과한 영상물이 다른 법에 저촉돼 처벌을 받은 사례가 여러 번 있었다”고 밝혔다.
◇업계,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에 울상=이번에 판결대상이 된 A게임 개발업체의 관계자는 “게임업소가 상품권을 환전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해당법에 저촉될 수 있다고 인정할 수 있지만, 그 밖에 판시한 부분은 석연치 않는 게 많다”고 말했다.
일반인들은 이 게임이 사행성 기구인지 판단할 수 없고, 따라서 법적으로 권한을 가진 영등위를 통해 필요한 절차를 밟아 제공 여부를 확인받았다는 데도 법원이 사행행위라고 판결한 것은 국내 법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이러한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피해는 정부, 단체, 언론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기 때문에 항소를 통해 잘잘못을 가려나가겠다”면서 “이번 사태가 산업계에 미칠 엄청난 파장을 고려, 법적으로만 대응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몰라라식 단속 우려=관련업계는 이번 일을 계기로 혹시 경찰이 ‘실적 올리기용 단속’에 나설까 우려하고 있다. 아직 1차 판결에 불과하고 법적 논란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이를 근거로 아케이드 게임영업장을 단속 타깃으로 삼는다면 문제는 일파만파로 커진다는 것이다.
관련업계에서는 항소를 통해 무죄를 입증받더라도 영업정지 등을 받은 뒤라면 이미 본 피해는 보상받을 길이 없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업계가 가장 우려하는 대목도 바로 이 부분이다. 관련업계는 실제 이번 지방법원 판결 내용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 자체를 쉬쉬하고 있는 입장이다.
류현정기자@전자신문, dreams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