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등록증을 찢어라?
얼마전 KBS <열린 채널>에서 내보낸 프로그램 제목이다. 저예산 독립영화로 이름이 알려진 이마리오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로, 방송여부를 놓고 엎치락 뒤치락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빛을 보게 됐다.
대한민국 국민임을 증명하는 13자리 개인식별번호, 주민등록증. 도대체 왜 멀쩡한 주민증을 찢어야 한다는 말인가. 감독은 주민등록증제도가 국민을 분류하고 통제하기 위한 국가권력의 파시즘적 발상이며, 그 통제과정의 핵심은 지문날인이라고 주장한다. 요즘들어 이처럼 주민등록증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다양한 사회계층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알고보면 주민등록번호는 무서운 코드다. 13자리 번호로 전국민의 정보를 분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캐비넷 속에 들어있는 아날로그 서류는 물론이고, 컴퓨터와 통신망을 떠다니는 디지털파일 속에는 개인의 신상정보들이 떠다니고 있다. 주민등록번호는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개인정보를 정리해주는 공통분모다. 만일 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이나 편리한 디지털사회 구축을 명분으로 내세워 대국민 감시시스템을 만들겠다고 나서면, 주민등록을 기반으로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그물망 데이터베이스를 짜낼 수 있다.
실제로 정부는 지난 1996년 전자주민카드와 2001년 전자건강카드를 도입하려다가 국민의 반발로 포기한 적이 있다. 전자주민카드는 7개 증명, 41개 개인정보를 단 1장에 수록할 예정이었다. 이와 같은 정보 통합 시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 선진국에는 왜 주민등록증이 없나.
이같은 위험성 때문에 선진국에는 개인식별번호가 없다. 국민고유번호를 부여하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 워낙 인권침해의 소지가 높다보니 선진국에서는 함부로 채택을 하지 못하고, 아예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린 국가들도 있다.
독일의 경우 주거등록제도와 국가신분증제도를 두고 있지만, 이 둘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 국가신분증을 발급할 때 찍혀나오는 일련번호는 사람이 아니라 증명서 자체에 부여되는 것이다. 새 신분증을 발급받으면, 새 번호가 나온다. 또 신분증에 새겨진 번호는 단지 의미없는 숫자의 나열일 뿐이다. 이 일련번호로 DB에서 인적 사항을 추출하는 프로파일링(profiling)이나, 여러 DB자료를 연관시켜 찾아보는 머징(merging)은 엄격히 금지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개인고유번호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무산되고 말았다. 이미 1979년에 컴퓨터로 읽을 수 있는 형태의 개인신분확인카드 (이름과 출생일만 포함되고 개인고유번호는 사용하지 않음) 발급을 계획했지만 그마저 시민 단체의 반발로 취소됐다.
일본 역시 신분등록제도로 호적제도를, 주거등록제도로 주민기본대장제를 두고 있으나, 국민에 대한 개인식별번호제는 채택하지 않고 있다. 주민기본대장카드는 국가가 아니라 시,읍,면장이 교부한다. 서비스 제공범위도 법률로 한정된다. 어떤 서비스를 받을 것인지는 주민이 선택하고, 목적 외의 이용은 엄격히 금지된다. 주민표의 코드는 무작위 번호로 주민의 신청에 의해 언제라도 변경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 되는 움직임도 있다. 신분증이 없거나 허술한 종이신분증을 사용했던 나라들이 하나둘씩 전자신분증 도입을 추진하는 사례가 생겨나고 있는 것. 이런 시도들은 반대여론에 부딪혀 실행되지 못하고 있으나, 편리성과 테러위협 등을 이유로 도입에 찬성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미국의 경우 국민고유번호는 도입하지 못한 대신, 여권이나 비자에 생체인식 칩을 내장하는 방식으로 첨단신분증 도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 그때 그시절엔 도민증이 있었다.
우리의 경우 정부가 주민등록제도를 통해 관리하고 있는 개인신상정보는 출생, 혼인, 출산, 사망, 주소, 학력, 혈액형, 병력 등 무려 1백41개에 이른다. 이 정보들은 본인이 사망한 이후에도 80년 동안 보존된다.
이같은 주민등록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주민등록증의 역사는 6.25 전쟁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혼란의 와중에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경찰서에서 시·도민증을 발급했던 것. 전쟁이 끝나고 어수선한 시절에는 불심검문이 많았는데, 이때 도민증을 내놓지 못하면 경찰서로 연행되어 귀찮은 일이 많았다.
도민증이 사라진 것은 1968년 5월. 새 주민등록법에 따라 12자리의 주민등록번호가 생겨났다. 이때만 해도 주민증 발급이 의무사항은 아니었다. 음식점 주인들은 주민증을 귀한 것으로 여겨서, 외상도 해줄 정도였다.
주민등록이 의무화된 것은 70년 주민등록법이 개정되면서부터다. 만 18세 이상의 국민은 누구나 개인식별번호를 받게 됐다. 그렇다고 처벌규정까지는 없었다. 75년 3차 개정때는 주민등록번호가 13자리로 바뀌면서 가로쓰기 형식이 도입됐다. 이때부터 주민등록 의무가 지켜지기 시작했다. 77년에 이뤄진 4차 개정에서는 세대별 주민등록표 이외에 개인별 주민등록표가 만들어졌다. 새로 생긴 주민등록표에는 지문을 비롯한 개인의 신상정보가 빠짐없이 기재됐다. 뿐만 아니라 주민등록증의 발급통지를 받고도 정당한 사유 없이 1년 이상 발급받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벌금이나 구류를 처할 수 있도록 하는 벌칙규정도 도입됐다.
그러다가 99년에는 지금과같은 플라스틱 주민증이 등장했다. 사진이 오래돼 신분확인조차 어렵고 비닐코팅 처리로 인해 위·변조가 용이하다는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요즘 사용하는 플라스틱 주민증에는 카드 앞면에 `대한민국`이라는 글자와 무궁화 무늬가 홀로그램으로 특수처리되어 있다.
결국 주민등록증은 불행한 역사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6.25와 유신통치를 겪으면서 국민통제를 위한 수단으로 굳어졌으니 말이다.
◆ 난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다 안다.
우리나라에서 실명과 주민등록번호의 중요성은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쇼핑몰이나 채팅사이트, 무료 웹메일 등 종류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인터넷 사이트에서 주민번호를 묻는다. 성별, 주소, 집전화, 휴대폰 번호까지 필수다. 여러 가지 혜택을 미끼로 주거상황, 금융자산 규모, 차량보유여부, 가족관계 등을 묻기도 한다.
시내전화나 이동전화에 가입할 때 의무적으로 작성하는 청약서에는 요금 자동이체에 사용될 신용카드번호나 은행 계좌번호 등을 써야 한다. 작성된 청약서는 지점이나 대리점 컴퓨터를 통해 통신업체 본사의 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되고, 가입자가 서비스 이용 계약을 해지해도 이 정보는 업체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몇 년전만해도 정보공개를 꺼렸던 네티즌들이 이제는 별다른 생각없이 자신의 인적사항을 드러내놓고 있다. 홈쇼핑과 홈뱅킹이 가져다주는 편안함과 달콤함이, 정보공개에 대한 거부감을 누그러뜨려 준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대량의 개인정보 유통에 함정이 있다는 것이다. 주민등록번호와 실명은 이미 돈으로 거래되고 있다. 그리고 주민등록번호와 실명만 알면 한 개인에 대해 더 많은 정보들을 어렵지 않게 얻어낼 수 있다.
실제로 전자정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한 개인의 주민등록번호와 인증키만 기입하면 토지정보와 자동차정보 등을 손쉽게 얻을 수 있다. 4대보험이 통합되면 건강이나 고용관계 등까지 파악할 수 있다. 신용평가업체가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실명과 주민등록번호를 기입하면 개인의 신용정보를 알려준다. 신용카드로 물건을 구입한 내용도 파악할 수 있으며 일정 기간 동안 가입한 인터넷 사이트가 어디인지도 알아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내 취향이나 사상이 나도 모르게 공개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가입한 사이트가 드러나면, 평소 나의 관심사를 남들이 눈치채게 된다. 누군가 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이용해 특정사이트 게시판에 내가 올린 글들을 찾아보게 된다면, 머릿 속 생각까지 낱낱이 들키는 셈이다.
◆ 주민등록, 함부로 알려주지 말자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주민등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인식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당연한 국민의 의무라고만 여겼다. 주민등록법의 문제점이나 부당성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사람도 없었다. 현행 주민등록법에 대한 논란이 일기 시작한 것은 10년도 안 된다. 1996년 김영삼 정부시절 스마트카드 도입 추진에 대해 국민들이 인권침해라고 반발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주민등록을 폐지론자들은 개인의 지문을 수집·보관하고 전산자료로 전환하는 것은 명확한 목적이나 법률적 근거도 없을 뿐 아니라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일이라고 항변한다. 수사기관이 필요한 증거를 원할 때는 법원의 영장을 발부받아야 하지만, 지문의 경우 개인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어 영장주의 원칙에도 어긋난다고 반대론자들은 주장한다.
그렇다고 주민등록번호를 폐지할 수 있을까. 없애버리기는 이미 너무 늦었다. 불행한 역사의 산물이긴 하지만, 이미 주민등록번호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시스템은 어쩔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정보에 대한 통제를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하라는 요구를 버젓이 하고, 당연한 듯 아무 거리낌없이 그 요구에 응해왔던 관행은 고쳐져야 한다. 그동안은 아무나 원하는 것이 주민등록번호이고, 누구에게나 가르쳐주는 것 또한 주민등록번호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주민등록번호를 함부로 요구해서도 안되고, 알려줘서도 안된다. 특히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할 때 신상정보를 제공하는 일에는 보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서비스업체측에서 회원정보를 함부로 유출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서비스약관을 잘 살펴봐야 한다. `하나의 ID 서비스`라는 명분으로 회원정보를 다른 계열사나 협력사와 공유해도 좋다고 쓰여있는 경우가 있다. 아예 `제3자 등`에게 개인정보를 제공하도록 포괄적인 규정한 내용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되도록 이런 사이트는 피해가는 것이 안전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자기정보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