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밤의 공포 - 날 너무 알려고 하지 마!

..... 2020년의 무더운 어느 여름날. 스팸전화 한 통이 단잠을 깨운다. 며칠 내로 내가 은행에 돈을 갚지 않으면 신용불량이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나긋나긋한 목소리의 텔레마케터는 아파트 담보대출을 권유한다.

출근길 지하철 계단을 내려갈 때도 스팸광고는 뒤통수를 따라 온다. 에스컬레이터 옆 벽면에 붙어있는 광고표지판이 넌지시 말을 건다. "J씨 좋은 아침이군요, 가장 싼 대출이자를 원하신다면 전화주세요"

길거리 광고들이 홍채인식 디스플레이로 바뀐 것은 오래 전 일이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나를 둘러싼 공간 어딘가에서 어김없이 홍채인식 카메라가 작동한다. 지하철에 오르자 직장상사에게 문자메시지가 날라온다. "자네도 어제 술 한잔 했나? 출근이 늦었군. 두 칸만 앞쪽으로 와보게."

이제 인스턴트 메신저(IM)는 온라인에서 뛰어나와 오프라인까지 점령했다. `친구찾기` 기능만 신청해놓으면, 유비쿼터스(u) 메신저가 어김없이 동료의 위치를 추적한다. 반경 100미터 내에 아는 사람이 들어온다면 휴대폰과 PDA가 부저음을 울려준다.

이제 외근을 나간다는 핑계로 딴짓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직장상가가 내 이동경로를 빠짐없이 체크할 수 있으니 옴짝달싹할 수 없지 않은가.

사무실에 들어 갈때는 출퇴근 카드 대신 홍채인식기를 쳐다보기만 하면 된다. 지문을 찍는 회사도 있지만, 독신자아파트에 침입해 엄지손가락을 잘라가는 엽기적인 강도사건이 빈번이 일어난 후 홍채확인으로 바뀌는 추세다. 이러다가 눈알을 빼가는 강도사건도 일어나는건 아닐까 생각하니 식은땀이 난다.

퇴근 후 그녀와의 데이트. 단골 레스토랑으로 가자 주인아저씨가 묻는다. "늘 드시던 메뉴로 준비할까요? 입맛에 맞으실만한 스파게티도 새로 나왔는데 한번 보시죠" 이 식당의 고객관리(CRM) 시스템은 빈틈이 없다. 주방장에게 전자주문표가 건네질 때에는 평소에 내가 생강을 지독히 싫어한다는 것, 스파게티면은 푹 삶아야 하고, 마늘은 듬뿍 넣어야 하며, 고기보다 해산물을 즐기고, 여자와 동석할 때는 창가의 흡연석을 고집한다는 것 등 내 취향이 꼼꼼히 표시된다. 흐음~~ 이럴땐 디지털세상이 편리하군.

이제 집이다. 수줍음 많은 그녀를 집까지 데려오기 위해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작업(?)을 해왔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집안 인테리어는 밝고 경쾌하게 꾸몄다. 부엌에서 와인 한 잔을 준비하며 뜸을 들이는 동안,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거실에 앉아 기다리던 그녀가 디지털 TV의 스위치를 누른 것. 아뿔사, 평소 내가 밤마다 시청하던 포르노영상이 자동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녀가 채널을 돌리자, 이번에는 인터넷경마다. 다음엔 러시아 미녀들과의 화상채팅.. 이런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어떻게 만회한단 말인가. 그녀는 잠시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더니, 샐쭉한 표정으로 일어선다.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와인은 다음에 마시죠"

그녀를 말리려고 하는 순간, 초인종이 울린다. 문을 열고보니 경찰이다. 홍채인식단말기로 나를 확인한 경찰은 다짜고짜 수갑을 채운다. 며칠 전 일산에서 일어난 엄지손가락 연쇄절도사건의 범인으로 체포한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범행장소에 어김없이 갔었다며, 내 행적을 기록한 데이터베이스를 들이민다. "난 아니야~. 누군가 내 홍채정보를 복사한 후 경찰 데이터베이스망을 해킹한거라구" 소리를 질러봐도 소용없다.

다행히 나는 사건당일에 친구들과 강남에서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진땀을 흘리며 알리바이를 입증하고 나온 나는 허탈하게 집으로 향한다. 이렇게 재수없는 날도 있나.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새삼 생각해본다. 이건 완전히 어항속의 금붕어가 아닌가. 테러의 위험성에서 시민을 보호한다는 논리로, 언제부턴가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외면당하고 있다. 시민들도 편리함이라는 단맛에 길들여진 나머지, 개인정보가 공개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만일 누군가가 내 일생을 교묘하게 조작해 데이터베이스 위에 올려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진짜 내 행적들은 모조리 삭제되고, 파렴치한 어느 범죄자의 기록이 전자주민증에 복사된다면 말이다......



너무 심한 과장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웃으며 넘길 일도 아니다. 알고보면 우리나라처럼 빅 브라더가 등장하기 쉬운 나라도 드물다. 이미 전 국민에게 13자리의 개인식별번호가 부여되어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흩어진 디지털자료들을 주민등록번호로 한 데 모을 수 있다. 평소에 인터넷 사이트를 가입하면서 무심코 흘리고 다녔던 신상정보부터 통신회사, 카드회사, 심지어 학교와 병원에서 보관해둔 파일들까지 합쳐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건 정말 위험한 상상이다. 내가 어떤 옷을 사고 뭘 먹고 누구와 돌아다녔는지, 어린시절에는 어떤 병을 앓았고 성적은 어땠으며 학교에서는 무슨 벌을 받았는지, 우리 가족 중에 범죄나 정신병력을 가진 사람은 없는지. 시시콜콜한 기록부터 지워버리고 싶은 치부까지 전자꼬리표가 되어 일생을 따라다닌다면 얼마나 오싹한 일인가. 개인정보 관리를 소홀히 한다면, 언젠가 공포는 현실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