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서정욱 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 이사장(12)

(12)전시회 공개 시연 성공

1993년 12월부터 1995년 12월까지 2년간 CDMA 개발 전쟁을 치른 후 필자(앞줄 가운데)와 개발진들이 공동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1995년 초 CDMA는 상용시험에 들어갔다. 이동전화는 주행 중에 단말기-기지국간에 핸드오프(Hand-off)가 안되면 화중절단이 된다. 그래서 기지국 배치의 최적화인 셀플래닝(Cell planning)을 잘 해야 한다. 서울은 인구밀도, 지형, 건축물 때문에 쉽지 않다. 관리단은 밤낮없이 서울 구석구석을 누비며 기지국 배치와 안테나 자세를 하나하나 최적화했다.

95년 3월, 선경에서 KMT사장을 맡으라는 제의를 받았다. 정부의 요청으로 CDMA 사업을 수렁에서 끌어냈는데, 이젠 CDMA로 돈을 벌어달라는 기업의 요청이다.

95년 4월 LG-삼성 시스템 간, LG-현대 시스템간의 핸드오프를 수차례의 시험평가와 수정보완 끝에 실현했다. 어떤 기종, 어떤 망이라도 통합해서 운용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게 됐다.

95년 5월, 서울과 수도권에서 CDMA서비스를 자체 평가했다. 화중절단으로 실추된 KMT의 명예를 CDMA로 회복할 수 있을지. 그러나 단말기가 불완전하고 기지국, 교환국 등 시스템이 불안정해 호(呼) 완료율이 저조했다. 시행착오 끝에 시스템이 안정되고 호 완료율도 개선됐다. 95년 6월, 정보통신 전시회에서 CDMA서비스를 공개 시연했다.

관리단은 CDMA시스템 가입자 용량이 아날로그 방식의 10배 이상이며 통화품질이 우수함을 입증했다. 이렇게 빨리 될 줄 몰랐다는 외신 기자도 있었다. 관리단은 국민에게 알릴 의무도 있지만 보안을 통해 훼방집단의 흑색선전과 경쟁대상의 정보전쟁에 대응해야 했다. 호사다마가 될까 홍보를 자제했고, 언론도 이해하고 협조해줬다.

95년 7월부터 생산업체들도 기지국을 늘려 자체 시험평가망을 확장하고, 9월에는 AMPS-CDMA 간의 호연동(呼連動)을 업체 연구실에서 실현했다. 그런데 운용현장에서 재현하려고 하니 지형, 건물, 전파간섭 등 환경이 달라져 계속 실패했다. 궁즉통(窮卽通)이랄까 연구실 지식을 운용현장에 적용하는 지혜를 짜내 재현에 성공하자 관리단과 생산업체들은 한밤 중 대로에서 얼싸안고 만세를 불렀다.

95년 12월, 96년 초의 상용서비스를 며칠 앞두고 기지국과 단말기 소프트웨어에 치명적 결함을 발견했다. 밤을 새워 해결은 했지만 모두 얼굴이 누렇게 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믿었던 퀄컴 단말기에서 계속 버그가 나타났다. 마침 퀄컴 사람들이 홍콩을 거쳐 한국의 동정을 살피려고 나타났다. 그들에게 “당신들을 인질로 잡겠다”며 전화를 건네주고 “가족한테 전화는 걸게 해주마”고 농담을 했다. 퀄컴측은 단말기 버그를 잡느라 크리스마스를 서울에서 보냈다. 귀국할 때 나는 가족들에 선물을 전했다. 세계 최초의 CDMA 상용화는 최후 일각까지 포기하지 않는 정신력으로 이룬 것이다.

93년 12월부터 95년 12월까지, CDMA전쟁은 하루 하루가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사생결단이었다. 80년대에도 TDX전쟁을 했지만, 상용화된 것을 알고 있었고 구매자가 독점업체라 위험부담이 적었다. 그러나 CDMA는 상용화한 일도 없고 구매자가 경쟁업체들이라 개발에 성공해도 구매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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