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서정욱 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 이사장(13·끝)

1995년 말, 정통부 장관이 또 바뀌었다. CDMA사업을 무산시키려 왔다는 풍문이 돌았다. 뒷받침이라도 하듯 신세기는 허가 조건인 CDMA를 외면하고 AMPS를 도입하기 위해 드나들고, KMT에도 NAMPS를 도입하자는 사람이 있었다.

96년 신년 하례식에서 장관을 만났다. 전화를 걸기 위해 자리를 뜨려 하자 나는 갖고 있던 전화기를 내밀었다. 걸고 난 다음 그것이 CDMA 전화라 말하고 면담을 신청했다. 면담 후 그는 CDMA사업은 듣던 것과 다르다며 소신껏 추진하라고 격려했다. 나라와 CDMA사업을 위해 좋은 만남이었다.

96년 초. 한국은 세계 최초의 CDMA 이동전화 서비스를 기록하고 내외의 이목을 끌었다. 일본, 중국 등지에서 찾아오고 경험을 듣자고 우리를 초청했다. 한국이 이동통신에서 높은 평가를 받음은 물론 그 이미지와 브랜드도 격상했다. 또한 한국의 정보통신기업들이 세계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제공하고 용기를 북돋운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CDMA사업의 성공 요인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정부의 국산개발정책과 단일 표준화 결단이다. 그리고 TDX사업의 교훈을 살려 연구소 주도의 공동개발을 업체 주도의 경쟁개발로 사업관리 체제를 전환한 것이다. 단말기 개발에 조기 착수하고 보조금으로 내수를 진작하고 경박단소화로 상품경쟁력을 확보한 것. 경쟁을 통해 비음성서비스를 확산하고, 서비스 지역을 확장했으며, 네트워크의 가용성·안정성·신뢰성을 조기에 확보했다. 그리고 국민의 높은 이용능력과 높은 인구밀도가 기업의 투자 회수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단말기를 개발할 때의 얘기다. CDMA 표준신호를 구할 수 없던 때라 업체들이 단말기를 개발할 길이 없었다. 삼성의 단말기 개발팀을 대덕연구소 근방의 호텔에 투숙시켰다. 연구소에는 CDMA 시범장치(RTS)를 밤낮 켜놓게 하고, 거기서 나오는 전파를 이용하도록 했다. 혼신의 노력 끝에 통화에 성공했다는 전화를 받고 빵과 음료를 사들고 밤길을 달려갔으나 허탕을 친 일도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CDMA 단말기는 국산화에 성공했다. 나는 KMT사장으로서 초기의 국산단말기는 묻지마 구매를 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의 CDMA 단말기는 내수를 충족하고 수출까지 하게 됐다.

CDMA 장비는 96년부터 2002년까지 약 54조5000억 원의 공급실적을 올렸다. 이중 내수 약 35조 원, 수출이 약 154억2000만 달러다. GSM/TDMA 장비는 205억2000만 달러 가량을 수출했다. 2003년에 단말기는 CDMA 67억5000만 달러, GSM/TDMA 98억3300만 달러를 수출했다.

CDMA는 96년 IS-95A, 99년 IS-95B, 2000년 CDMA2000 1x 이동 인터넷, 2002년 CDMA2000 1x EV-DO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장은 포화 돼 가는데 업체들은 허장성세와 고객 빼앗기로 소모전을 하고 있다. 이들의 앞날이 걱정된다.

난마(亂麻)와 같은 CDMA사업을 쾌도(快刀)로 훑다 보니 세월이 제법 흘렀다. 아무도 가지 않은 CDMA의 길을 매일 새로워지는 충격에 단잠 못 이루며 6년을 걸어왔다. 할 일을 다 했고 구들도 식어가니 일어날 때를 생각했다. 98년 말, 가지 않은 길을 또 찾아나서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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