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게임리그는 무엇일까?’
한국의 게임 팬들에게 묻는다면 당연히 관객 10만명을 돌파한 스타리그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미주나 유럽의 게임 팬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CPL이라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CPL은 1997년 달라스의 한 쇼핑몰에서 시작된 이벤트로 당시에는 본격적인 e스포츠라고 보기 어려웠다.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상용화 되기 시작한 시점에 모뎀으로 게임을 하면서 짜증을 내던 게이머들을 대상으로 한자리에 전용선을 깔아놓고 고속 통신망으로 게임을 하게 하면서 대신 참가비를 받았던 그야말로 `허접한` 이벤트였다.
98년과 99년을 거쳐 기반을 쌓은 CPL은 2000년에 글로벌화를 시도하다 실패하면서 내리막길을 걷는다.
바로 이런 CPL이 문을 닫기 직전에 이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 시작된 WCG였다. 삼성전자는 2001년부터 상상키 어려운 예산을 들여 CPL과 거의 비슷한 모델의 WCG를 마련했다.
삼성의 전 세계 마케팅 조직은 WCG를 홍보하기 시작했으며 더불어 e스포츠가 대단하다는 메시지를 뿌려댔다. 삼성의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마케팅은 e스포츠가 가능성 있는 비즈니스이고, WCG(혹은 같은 모델의 CPL)가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서 대단한 영향력이 있음을 역설해 댔다.
그러나 결과는 삼성을 제외한 전세계 디지털 기업들이 새로운 마케팅 툴로서 CPL을 주목하게 하는 것이었다. WCG가 어설픈 독주를 시도하는 모습에 반감을 가진 글로벌(특히 영어권) 기업들은 CPL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최근 CPL은 ‘카운터 스트라이크’의 인기를 바탕으로 다시 급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번 칼럼에 언급했듯이 e스포츠 모델은 두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미국식 ‘랜파티’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식 ‘게임리그’다. 그런데 WCG는 한층 발전한 형태인 한국형 모델을 도외시한 채 미국형 모델을 따랐다.
결국 WCG는 삼성이 미국식 모델의 전도사 역할을 하는데 엄청난 자금(업계에서는 지난 4년간 1200억원을 투입한 것으로 분석)을 쏟아부은 결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한국형 게임리그는 ‘스타크래프트’ 한 종목을 가지고 한반도 남부의 작은 시장에서만 통하는 e스포츠로 대접을 받게 됐다.
최근 CPL이 2005년도 계획을 발표했다. 1월부터 12월까지 매달 전세계를 돌며 CPL 투어를 한다는 것이 골자다. 이러다 한국형 e스포츠 문화는 세계로 뻗어나가지 못하는 우리만의 놀이문화로 전락하고, 세계 e스포츠의 주도권을 WCG가 뿌려놓은 씨앗을 수확하고 있는 CPL에게 내줘야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CPL의 이번 발표는 한국 e스포츠를 가꿔온 필자로서는 화가 치미는 소식이다.
<게임캐스터 nouncer@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