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래프트3’ 프로게이머 지병걸 군(21)과 여성 최고의 실력자 육소정 양(24)은 게임으로 맺어진 자타가 인정하는 ‘워3 커플’이다. 나이는 소정 양이 세 살 많다. 하지만 호칭은 “병걸아! 응, 소정아!”하며 친구처럼 통한다.
‘워3’ 와이즈 클랜에서 함께 활동하던 회원 사이에서 연인 관계로 발전한 것은 1년 전쯤이다. 지난해 4월 소정 양이 신입 클랜원으로 들어왔고 팀플전 파트너로 짝을 이뤄 자주 게임을 하면서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클랜원들에게 우리 사귀고 있다고 말하니까 놀라기는 커녕 ‘그럴 줄 알았다’, ‘웬지 자주 팀을 이뤄 게임을 하더라’라며 당연히 짐작하고 있었다는 반응이었어요.” 소정 양이 쑥스러운 듯 처음 사귀게 된 때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이에 대해 병걸 군은 “클랜 활동하며 자주 만나고 친해졌지만 아무래도 둘 모두 게임을 워낙 많이 하고 특히 팀플을 자주 하다 보니 더 가까워진 것 같다”고 답했다.
실제로 소정양은 와이즈 클랜에 가입해 병걸군과 팀플을 하며 실적이 크게 늘었다. 집에서 알까 봐 몰래몰래 하던 게임이었는데 몇 차례 우승과 함께 상금과 상품까지 보여주자 그 때부터 잘해보라는 격려 분위기로 변했다.
하지만 누가 먼저 관심을 표현했는지, 누가 먼저 사귀자고 제안했는지는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소정양이 “병걸이가 팀플을 함께 하자고 여러 차례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말하면 병걸군은 “누나(옆에 누가 있으면 누나로 호칭)가 주로 먼저 하자고 그랬잖아”라며 맞받아치거나 아예 고개를 숙여버렸다.
# 데이트 장소는 PC방, 메뉴는 ‘워3’
게임에 푹 빠져 때로는 밤이 새도록 팀플전을 벌이고 더욱 가까워 질 수 있었던 것은 지난해까지 둘 모두 백수였기에 가능했다. 올 들어서는 병걸군이 대학에 진학했고 소정양은 회사에 입사해 밤샘 게임은 좀처럼 하기 어려워 졌다.
그래서 둘이 데이트 장소로 가장 많이 가는 곳이 PC방이다. 물론 밥 먹고 영화도 보지만 열번 만나면 열번 모두 PC방에 간다. 특이한 것은 ‘워3’ 외에 다른 게임은 쳐다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겹지도 않느냐’고 묻자 숨겨 놓은 속내를 털어놓는다.
“왜냐면요…, 이왕 노는 거 PC방에서 ‘워3’ 게임하면 연습도 되고 실력도 조금이나마 쌓이잖아요. 돈도 적게 들고요.” 이때도 병걸군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는 불쑥 한마디 “장해요∼”
‘워3’ 게임, 그중에서 함께 한 팀플전이 둘의 사랑의 싹을 틔워줬지만 팀플전 성적이 그리 좋지많은 않다. 팀플의 기본이라는 협동 플레이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상대 한 명씩을 맡아 공격하는 개인 플레이를 주로 펼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소정양은 불만이 많아 보였다. 소정양이 눈을 흘기며 불만을 털어놓는다. “막 혼자서 공격하러 가는 거예요. 나는 뭘 하든 상관 않구요. 만약 둘 다 이기면 다행인데 한 명이라도 지면 1대1 상황이 되잖아요. 내가 남게 되면 어렵죠. 상대는 대부분 남자 팀플조거든요.” 소정양이 눈을 흘기며 병걸군을 쳐다봤다.
이에 대해 병걸 군은 “그것도 일종의 작전이예요. 지금은 많이 도와주러 가요.”라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팀플 하면서 잘 맞거나 기분 좋았던 때도 있었을 거 아니냐’고 물었다. “한번은 그런 적이 있어요. 게임에 열중해 있는데 맵 중앙을 지나다가 하트 모양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죠.
‘워3’ 게이머라면 알겠지만 맵 중간에 그림이나 글씨를 새겨넣을 수 있는 공간이 있거든요. 또 한번은 I LOVE YOU라는 글씨도 보았죠.” 갑자기 닭살이 돋는 듯했다. 물론 지 군의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다.
# 팀플전 파트너로 사랑 키워
‘워3 닭살 커플’은 아쉽지만 게이머에 대한 꿈을 접었다. 미래가 너무나 불투명하다는 생각에서다. 병걸군은 최고의 ‘워3’ 프로게이머를 꿈꾸며 고등학교 때부터 3년 넘게 해온 선수 생활을 접고 올해 대학에 진학했다. ‘워3’ 여자 대회에서 우승까지 차지했던 소정 양 역시 새로 직업을 갖고 일반 사회인의 길을 걷고 있다.
“‘워3’가 활성화되지 못한 것은 둘째 치고 언제부턴가 내 종족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지고 두려워졌어요. 아쉽기는 하지만 남성 게이머 간의 경쟁마저 저렇게 심한데요.”소정 양의 말을 받아 “맞아요. 주위에서 그만두는 선수들 보면 안타깝죠.
‘워3’가 더 이상 활성화되지 못하는 것도 아쉽구요”라며 병걸 군이 말했다. ‘워3’에 대한 진지한 얘기가 나오자 병걸군은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쏟아 냈다.
“아직 젊잖아요. 처지가 좀 어렵더라도 우리 둘이 예쁜 사랑 키워 갈래요.” 소정양이 먼저 어렵게 말을 꺼내자 다시 한번 얼굴이 빨개지며 병걸군이 말했다. “음…, 서로 안정된 자리를 빨리 잡아 좋은 방향으로 맺어졌으면 좋겠어요”라고.
나이를 뛰어넘어 ‘워3’가 맺어준 닭살 커플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달콤한 사랑의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임동식기자 임동식기자@전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