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테러의 정의가 달라지고 있다. ‘주요 기관의 정보 시스템을 파괴해 국가 기능을 마비시키는 신종 테러’란 뜻의 사이버 테러는 현실의 다양한 사이버 테러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최근의 사이버 테러는 ‘주요 기관’이 아닌 ‘일면이 없는 사람’에게도, ‘정보 시스템’이 아니라 ‘특별한 대상’도 없이 맹목적으로 행해진다.
◇‘정의’란 이름의 또 다른 ‘테러’=지난 7월 유명 커뮤니티 사이트에 글 하나가 올라왔다. 남자친구가 이발을 하러 갔는데 실수로 귀에 상처가 생겼다는 한 여성의 글이었다. 그런데도 업체 측의 사고 대처가 너무 미흡해 화가 났다는 항의성 내용이었다.
이 글이 올라오자 네티즌들은 불같이 들고 일어섰다. 네티즌의 힘을 보여줘 서비스 업체의 횡포에 맞서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전화와 게시판 글 등을 통해 업체에 항의가 쇄도했다.
결국 양측의 합의가 이뤄졌으나 사건은 엉뚱한 곳으로 번졌다. 피해자에게 상처를 입힌 서비스 업체 직원은 신상 일부가 공개되고 입에 담기 힘든 욕설까지 들었다. 또 하지도 않은 말을 한 것처럼 꾸며져 몹쓸 사람으로 매도당했다. 피해자측에서 문제의 직원에 대한 과도한 인식공격은 자제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또 성난 네티즌의 공격은 이번 사건과 직접 관계없는 사람에게로 번졌다. 문제의 직원 사진이라고 인터넷상에 올린 것이 전혀 다른 사람의 사진이었던 것이다.
◇나는 ‘재미’, 남은 ‘테러’=‘주요 기관’이 더 이상 테러의 대상이 아니듯 테러의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다. 해킹 뿐 아니라 패러디·사진·글 등 인터넷에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형태가 테러에 이용되는 듯하다.
명예를 훼손하는 패러디물, 미니홈피 등에 사생활에 관한 글이나 사진 등을 공개하는 행동들, 심지어 타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행동들 이 모든 것이 당하는 입장에서는 테러다.
한 유명 탤런트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인터넷 글 때문에 당한 피해는 글을 쓴 학생에게는 장난이었지만 본인에게는 그 어떤 테러보다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연예인들과 같은 공인에 대한 사이버 테러가 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 블로그, 미니홈피 등 개인의 사적인 공간이 늘어나면서 개인에 대한 테러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헤어진 여자 친구에 대한 복수심으로 비방글은 물론이고 자신들이 나누었던 이야기까지 언급하는 저속한 행동들로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이버 명예훼손 및 성폭력, 전자상거래 사기 등 정보통신망을 타고 자행되는 ‘사이버 범죄’ 검거 건수는 지난 2000년 1715건에서 지난해 말 5만 1719건으로 폭증했다.
◇자신의 본 모습을 찾아야=재미삼아 특별한 목적 없이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최근 사이버 테러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가면 뒤에 가려진 인간의 본성, 즉 익명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또 다른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88년 미국의 심리학자 스밀로위츠는 사이버 공간에서 동조 경향이 더욱 강해진다는 사실을 처음 발표했다. 온라인 대화창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틀린 답을 하는 것을 본 후 대답하면 자신도 틀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내용이었다. 집단의 의견을 좇아 정상적인 자신의 감각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규범이나 대다수의 의견 등에 개인의 의견이나 행동을 동화시키는 현상인 ‘동조’에 분노를 다른 대상에 풀어버리는 ‘감정전이’까지 겹치면 타인에 대한 맹목적인 공격이나 집단 따돌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심리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두 심리 현상이 가상공간에서 호도된 여론이나 그릇된 군중심리를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인터넷은 현실, 처벌도 엄격=인터넷이 익명성이 보장되고 현실과는 다른 공간이란 인식은 버려야 한다. 오히려 현실보다 무서울 수 있는 공간이 인터넷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특정 사람에 대해 험담을 할 수 있어도 인터넷에서 그런 일을 매우 위험하다.
무한 복제와 실시간 유포가 되기 때문에 자신의 당초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죽을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곳이 인터넷이란 걸 알아야 한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 관계자는 “표현의 자유가 허락된다고 해서 법에 어긋나는 모든 것이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호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현실과 인터넷 공간이 결코 다르다고 인식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장난성 글로 개인의 명예가 훼손되는 사이버 명예훼손도 당연한 범죄 행위이며 형법은 사이버 명예훼손에 대해 심각한 피해와 빠른 전파력 때문에 일반 명예훼손보다 가중처벌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특별취재팀> 김종윤차장(팀장), 김유경기자, 조장은기자, 윤건일기자
*사이버 범죄 예방 지침: 개인정보 유출 조심, 또 조심…
사이버 명예훼손과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은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귀찮더라도 조금만 신경쓰면 깨끗한 인터넷 만들기에 동참할 수 있다.
◇중성 ID를 사용한다=사이버 성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여성임을 알리는 ID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채팅방, 메신저 등 사이버 공간에서는 중성적인 ID를 사용하는 것이 사이버 성폭력을 예방할 수 있다.
◇철저한 개인정보 보호=낯선 사람에게는 가능하면 실명·주소·전화번호·사진 등 개인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온라인상 대화시 상대방을 주의하자=누구에게나 친절할 필요가 없다. 주의를 끌고자 하는 사람이더라도 당신이 원치 않는다면 반드시 상대방과 대화해야 할 필요가 없다.
◇직접 만나지 말자=온라인 상에서 만난 사람을 직접 만나려면 친구와 함께 공공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만나야 한다. 여러분이 어디서 만나는지 주위 사람에게 알리는 것도 필요하다.
◇바른 언어를 사용하자=비속어나 욕설 사용을 자제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사이버 명예훼손이 무섭다는 걸 알리자=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 관한 법률 제 61조에 의하면 사이버명예훼손은 일반 명예훼손보다 형량이 높다는 걸 협박하는 상대방에게 알려야 한다.
*e클린 지킴이: 유호경 사이버명예훼손·성폭력상담센터장
“인터넷에서 명예훼손이나 성폭력 피해를 입고 있다고 생각되면 증거를 최대한 모아야합니다. 화면 캡쳐도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됩니다.”
사이버명예훼손·성폭력상담센터 유호경(49) 센터장은 명예훼손이나 성폭력 시 피해구제를 위해서는 적극적인 증거 확보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를 갖고 있어야 법의 도움도 호소할 수 있다고 전했다.
“먼저 가해자가 없어야 겠죠. 하지만 아직 국내에는 명예에 대한 개념이나 중요성에 대해 인식이 희박한 탓인지 피해자도 급증하고 있습니다”
사이버명예훼손·성폭력상담센터에는 1주일에 평균 100∼120건의 사례가 접수된다. 이 중 70∼80%가 명예훼손, 모욕 등을 당해 피해구제 방법을 묻는 사람들이다. 상담은 인터넷 이용자가 가장 많은 20∼30대가 주를 이루며 올 상반기에는 10대의 증가가 두드러졌다.
“우스겟 소리인 것 같지만 자신도 당해봐야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겪어보지 않으면 사이버상에서 명예를 훼손당하고 성적 모멸감을 느끼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 모릅니다.”
자신의 글이나 홈페이지에 많은 댓글이 달리길 기대하는 가운데 욕설이나 비방글이 올라오면 단어 몇 개, 글 한 줄 때문에 입는 상처는 꽤 깊어 질 수 있다.
“별 생각 없이 하는 행동들이 타인에게는 심각한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서로 누군지 모르고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입힐 수 있는 상처는 큽니다” 오프라인에서는 모욕이나 비방을 당하면 화풀이라도 할 수 있는데 온라인에서는 그 같은 방법도 없어 상처가 오래간다는 게 유 센터장의 설명이다.”
유 센터장은 “가끔 IP를 추적해 달라는 분들이 많은데 IP를 알아도 IP 주소가 곧 가해자를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인터넷에서도 타인의 명예와 인격을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충고했다.
한편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지, 성폭력을 가하고 있는 건 아닌 지 궁금하다면, 또 자신이 그런 피해자인 지 아닌 지 궁금하면 센터를 찾으면 된다. 전화(02-3415-0182)와 인터넷(http://www.cyberhumanrights.or.kr)으로 쉽고 빠르게 상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