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재계에서는 눈에 띄는 인사가 있었다. 동국제강 장세주 회장의 동생이자 포항제강관리담당 부소장이었던 장세욱 상무(42)가 그 주인공. 그는 지난 9일 신설된 그룹 전략경영실장으로 발령받았다. 장 실장은 이제 동국제강이 ‘미래경영’을 위해 새롭게 마련한 전략경영실에서 7개 계열사를 거느린 동국제강그룹의 미래를 고민하게 됐다. 형 장세주 회장이 ‘현재경영’을 한다면 장 상무는 ‘미래경영’을 맡은 셈이다.
‘전략경영’이 기업경영의 새 화두로 떠올랐다. 기업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인재를 양성하고 표준기술을 확보하며 중장기적인 경쟁관계를 파악하고 예기치 못할 위험에 대비해 환경과 윤리경영 방침을 만든다.
‘경영전략’이 현재의 경영에 필요한 단기 전략이라면 ‘전략경영’은 중장기 기업의 비전을 만드는 전략적 준비인 것이다.
21세기 초 기업들은 새로운 위기에 직면해 있다. 2000년 IT버블 이후 투자회수를 못해 파산으로 치달은 기업들은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이고 기술은 급변해 이제는 독자영역, 독자시장에서 아성을 구축하기가 힘들게 됐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갈구하지만 방향타는 찾지 못하고 준비는 돼 있지 못하다.
기업 성패의 패러다임도 바뀌었다. 20세기에는 누가 더 값싸게 대량 생산 기술을 갖추느냐가 기업의 사활을 가름했다면 다가올 미래에는 누가 무형의 부가가치를 만들어 전세계에 확산시키느냐에 달렸다.
‘브랜드·표준·거버넌스·코피티션·인재양성·환경경영·1인기업’이라는 새 키워드가 제시된 것도 이 때문이다.
세계 대표 IT기업 소니와 인텔, 삼성전자, 마이크로소프트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오늘날 이들이 현재의 위치에 서게 된 것은 앞서 제시한 기업경영의 핵심 키워드를 모두 각자의 상황에 맞게 현실화했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우, PC운용체계인 ‘윈도’를 기반으로 인터넷 브라우저 ‘익스플로러’를 양대축으로 삼아 IT시장의 표준을 휩쓸었다. 향후 도래할 각종 홈네트워크, 통·방 컨버전스 시장에서도 MS는 플랫폼 표준을 장악, 무너지지 않는 MS신화의 구현을 꾀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반도체 메이커 인텔은 소비자가 전혀 볼 수 없는 부품이라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인텔 인사이드(인텔이 제공합니다)’라는 브랜드 마케팅 프로그램을 수립, 연간 수십억달러를 투입한다.
기업의 미래는 어디서 나올까. 이 질문에 많은 경영자는 ‘인재’라고 답한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천재 한 사람이 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인재경영 철학을 내세워 유명해졌다. ‘인사가 만사’지만 인재는 더 큰 부가가치를 낳는다는 것. 삼성의 경우, 각 계열사 임원의 경영평가에 유능 인재를 얼마나 확보했느냐가 반영된다. 이 때문에 임원진은 해외 출장시 절반 이상의 업무를 해외 인재 채용에 쏟아붓기도 한다.
‘데스밸리(Death Valley)’라는 말이 있다. 지난 80년대 미국의 교육 전문가들이 미국 대학교육의 위기를 지칭할 때 쓴 말로 대학에서 배출한 인력은 많은데 정작 기업에서는 쓸 사람이 없는 인력수급 불균형 상황을 말한다.
결국 만명을 먹여 살릴 천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단지 찾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하고 양성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삼성, SK, LG 등 대기업뿐만 아니라 해외 기업들이 모두 대학지원 프로그램과 산학협동 등 다양한 인적 투자를 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업윤리에 기반을 둔 환경경영 역시 21세기 기업경영의 필수조건. 후대를 위한 환경보전이 단지 비용이 아니라 현재의 기업생존 조건이 됐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단적으로 페놀 사건이나 우지 파동 사건 등의 예를 봐도 환경문제는 기업존폐를 좌우할 수도 있다.
반도체를 생산하는 인텔과 삼성전자의 경우 공정과정에서 나오는 오폐수를 정제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학은 교육과정을 혁신, 기업의 수요에 맞는 인재를 양성하고 기업은 대학 교육에 대한 지원을 강화, 인재 육성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
기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전문기업들과의 협력관계는 새 과제가 되고 있다. 내부의 경영효율을 높이고 투자효율(ROI)을 높이기 위해서는 ‘아웃소싱’이 필수적이다.
과거 대기업과 중소기업과의 협력을 단순히 지원 또는 자선으로 보는 인식이 있었으나 이제는 기업과 산업의 영속적 발전을 위한 필수 과제라는 시각. 결국 ‘윈윈(Win-Win)’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협력 모색이 필수적이라는 지적이다.
피터 오설리번 IBM 부사장은 “IT업체들이 과잉투자를 해소하고 투자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비핵심 분야를 아웃소싱하는 것이 핵심”이라면서 고객관리·IT정보시스템·콜센터 등 표준화된 아웃소싱 툴에 대해 제시했다.
‘1인 기업’의 성공사례도 기업경영자들을 긴장하게 하는 한 요인이다. 가수 보아는 지난 2년간 일본에서만 15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고 ‘욘사마’ 열풍을 일으킨 탤런트 배용준 역시 걸어다니는 기업이나 마찬가지다. 기업들이 이런 새로운 기업형태에 대한 대응도 고민해 둬야 할 과제다.
김언수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는 “기업경영에 있어 여러 환경 변화를 미리 감지하고 미션과 비전을 재정립하는 전략적 경영에 대한 요구가 더 높아지고 있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인재와 기술에 대한 투자, 그리고 부단히 변화에 대응하는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정지연기자@전자신문, jyjung@
◆표준전쟁
‘표준이 기술력보다 우위.’
시장표준을 확보하는 것이 기술을 개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저 유명한 ‘VHS(파나소닉)’와 ‘베타캄(소니)’의 표준전쟁 결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화질이나 기술방식에서 단연 앞서던 소니의 ‘베타’ 방식이 소비자들의 편의성과 가격경쟁력을 내세웠던 파나소닉의 ‘VHS’에 시장을 내줄 수밖에 없었던 얘기다.
20세기에 세계 열강들이 ‘원유(Oil)’를 둘러싸고 혈전을 벌였다면, 21세기는 ‘표준기술’ 전쟁의 시대가 되고 있다.
자국 기업들의 기술을 표준화시키기 위한 통상전쟁도 빗발친다.
WTO를 주축으로 벌어지는 통상마찰도 한겹 벗겨보면 결국 각국 정부는 자국기업들의 논리와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우리 정부는 미국 USTR와 휴대인터넷 기술 표준을 놓고 수개월의 밀고 당기는 협상을 벌였다.
국내 업체들과 TTA가 주축이 돼 개발한 2.3㎓ 휴대인터넷 국산 기술 ‘HPi(서비스명 와이브로)’를 놓고 플라리온·어레이콤 등 미국 업체들이 통상마찰 우려를 내세워 협상을 요구해 온 것.
미국업체들과 USTR의 지적은 한국이 기술을 독자 개발해 폐쇄적으로 운영하려 한다는 주장이었다.
반면 우리 정부는 외국 기술을 배제하고 국산 기술만을 독자 표준으로 채택하는 것이 아니며 ‘표준 방식’은 각국이 정할 수 있다고 맞섰다. 또한 국내 업체들이 개발한 ‘HPi’를 국제표준화단체인 미국전기전자공학회(IEEE)에 기고, 이동형 무선랜 기술인 802.16e에 표준 기술이 채택되면서 통상위기를 모면했다.
이 과정에서 고정형 무선랜 기술 ‘와이맥스(WiMAX)’를 표준화하기 위해 준비중인 인텔을 Hpi에 참가시켰다.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열린 IEEE 802.16 표준제정 회의에서는 KT, SK텔레콤, 하나로텔레콤, 데이콤 등 휴대인터넷 준비사업자들이 30여건의 기술을 제안해 20여건을 통과시키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또 션 말로니 인텔 부사장은 최근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을 만나 ‘와이브로’를 세계화하는 데 협력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물론 이 같은 성과는 무선인터넷 플랫폼 ‘위피(WiPi)’를 둘러싼 통상협상 과정에서 체득한 노하우가 뒷받침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피’ 협상은 퀄컴이 CDMA칩 원천기술을 바탕으로 이에 기반을 둔 무선인터넷 플랫폼 ‘브루’까지 턴키로 공급해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의도를 막기 위한 우리 산업계와 정부가 벌인 일대 표준전쟁이었다.
대신 우리 산업계는 ‘자바’ 기술을 가진 미국 선마이크로시스템스와 손을 잡고 위피 플랫폼 공동 개발을 추진했으며 최근 브루를 사용했던 KTF가 선과 손을 잡고 ‘위피2.0’ 개발에 나서면서 사실상 퀄컴의 독주를 차단하고 위피를 대중화하는 초석을 마련했다.
비록 목적은 이뤘지만 이번 위피 협상을 돌이켜보면 CDMA를 단독 표준으로 채택해 퀄컴의 손을 들어준 것이 우리에게 부메랑이 돼 올 수도 있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은 셈이다.
이제 더는 표준전쟁은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IT시장이 커갈수록 패권주의를 내세운 다국적 IT기업들의 경계는 더 거세질 수밖에 없다. 이는 곧 기술표준을 확보하느냐 마느냐가 기업의 성패와 또 해당국가의 IT산업의 흥망으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4G포럼을 개최한 삼성전자 관계자는 “표준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우선 표준화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기술을 부단히 개발하고 세계 표준기구에서의 활동을 늘려 위상을 강화해야 한다”면서 “기술과 표준확보, 그리고 이를 위한 정보 네트워크의 구축 등이 향후 우리의 과제”라고 말했다.
정지연기자@전자신문,jyj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