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기업 등 각종 조직을 운영하는 데 있어 과거와 달리 새로운 형태의 통치구조가 등장했다. 이른바 ‘거버넌스(governance)’다. 거버넌스, 즉 협력을 기반으로 한 통치를 의미하는 ‘협치’라는 말이 정치학, 행정학에서 새로운 조류가 됐으며, 이제는 정부 기관의 행정을 넘어서 기업 및 일반 사회 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거버넌스라는 말은 ‘탈중심화’ ‘네트워크 구조’ ‘협력’ 등 새로운 형태의 현상을 담아내기 위해 등장한 것으로 이제는 보편화한 용어로 자리잡고 있다.
거버넌스 개념의 출현은 정보통신 등 기술의 발달과 긴밀한 연관이 있으며, 향후 양방향성이 강조될 정보화 추세와 함께 거버넌스가 사회 속으로 급속도로 확산될 전망이다. 특히 기업의 회계 투명성 등이 강조되면서 경제 현상 속으로 이 용어가 깊게 침투할 것으로 보인다.
◇거버넌스, 거버먼트를 넘어서다=탈냉전, 세계화, 정보화 등으로 환경이 최근 10여 년간 급속도로 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근대 이래로 모든 형태를 지배해온 구조가 점차 변화하고 있다.
과거 지배권을 독점하던 정부가 이제는 각종 민간기구, 국제기구, 지역단체, 기업, 개인 등과 같은 비국가 행위자들의 영향을 깊게 받으면서 새로운 형태의 통치 형태가 생겨났다. 국가의 권력이 줄어들고 피지배 대상으로 있던 행위자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진 것이다.
이에 따라 과거 통치를 의미하는 ‘거버먼트’에서 다양한 행위자 간 협력을 기반으로 한 ‘거버넌스’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거버넌스는 정치학이나 행정학에서 특정한 통치 양식을 의미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되다가 이제는 새로운 통치 형태를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변화했다.
◇유비쿼터스 네트워크와 거버넌스=거버넌스 개념의 출현은 기본적으로 인터넷의 특성인 네트워크 구조와 유사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다원적인 행위자 간의 의사소통을 통해 다양한 의견이 결집, 지배구조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의사소통 구조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의견을 발표하고 그것이 획일화된 소통구조를 통해 대중에게 전파되는 일방향적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인터넷의 등장은 이 같은 의사 소통의 네트워크화를 실현할 길을 열어 준 일등공신이다.
통치 행위가 중간 매개자를 거치지 않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직접 전달될 가능성이 열렸으며, 역으로 개개인의 의견이 통치 행위로 연관되는 구조가 형성된 셈이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인해 과거에 비해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의사소통 네트워크가 갖춰지고 있다. 유비쿼터스 네트워크 시대로 인해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장치를 사용하든 통치 형태와 개인 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셈이다.
모든 사물이 생각을 하게 되는 유비쿼터스 컴퓨팅 시대에서는 개개인과 이해집단 간의 실시간 협력과 통치 행위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기업 지배구조도 거버넌스=거버넌스라는 용어는 정치·사회형태를 넘어서 기업의 지배구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주주의 중요성, 기업의 투명성 등에 대해 과거보다 훨씬 중요성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엔론사의 회계부정사건 이후 논의되고 있는 사베인스옥슬리(Sarbanes-Oxley) 법안과 국제회계기준(IAS) 등이 관심사가 되면서 투명하고 자동화된 기업 경영을 위한 안전 장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했다.
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해 누가 보더라도 투명하고 바람직한 기업의 지배구조를 만들자는 것이 기업의 거버넌스의 핵심으로 꼽힌다. 블랙박스처럼 운영됐던 기업 경영도 정보기술을 통해 투명성, 가시성, 통제성, 효율성을 갖추자는 주장이다. 한국 오라클 윤문석 사장은 “경영 환경의 변화에 따라 각종 현안에 대한 원인 분석 및 향후 예측과 이를 바탕으로 경영자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정보기술의 기능이 더욱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거버넌스, 일시적 유행인가=지난 90년대 중반 이후 거버넌스가 행정학 등에서 유행처럼 사용됐으나 이제는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이전에 유행한 거버넌스와는 달리 정보통신 기술의 혁신에 의해 이제는 양방행성, 실시간성이 더더욱 강조되고 있어 독단적이고 불투명한 형태의 지배 행위는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7월 지속가능발전위 주최로 열린 ‘갈등관리 워크숍’에 참석해 “21세기는 단지 국민주권의 시대가 아니라 권력이 분산되는 거버넌스 시대”라고 강조하며 “권력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고 분산된 권력 사이에서 적당한 타협과 합의를 이루는 체제로 대안적·창조적 참여가 중요하다“고 말한 것은 시대의 변화를 잘 말해준다.
김규태기자@전자신문, st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