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인을 접수하라.’
경제가 재도약하기 위해 꼭 해야 할 일이 ‘폐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라면 수긍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폐인(廢人)의 사전적 의미는 ‘병이나 못된 버릇 따위로 몸을 망친 사람’ 또는 ‘기인(棄人)’이다. 하지만 몇년 전부터 ‘어떤 일에 집중하는 사람’으로서의 의미가 부각되면서 폐인을 바라보는 인식이 급격히 바뀌고 있다.
‘드라마 폐인’ ‘인터넷 폐인’ ‘신제품 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양산되는 폐인은 단순히 자신들의 관심사에 함몰되는 것을 넘어 각각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발전시키는 준 전문가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기업들은 ‘공격적 소비자’로도 불리는 이들 폐인을 무시하다가 큰 코를 다치기도 하고, 이들을 잘 활용해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눈을 해외로 돌려보자. 그곳에도 공략해야 할 폐인들이 있다. 바로 한국적인 것에 열광하는 ‘한류 폐인’들이다. 한류는 지난 1996년 한국의 TV 드라마가 중국으로 첫 수출된 이래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에서 일기 시작한 한국 대중문화의 열기를 표현하기 위해 중국 언론이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이 같은 한류는 최근 단순한 문화 수출 단계를 넘어 관광, 쇼핑, 패션은 물론 제품에 이르기까지 연관 산업 분야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신한류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공격적 소비자로 대변되는 국내의 폐인과 한국적인 것에 열광하는 해외의 폐인은 이처럼 묘하게도 닮아있다. 우리 기업들이 반드시 공략에 성공해야하는 대상인 것이다.
◇잘못 걸리면 죽는다-공격적 소비자
지난 6월, MP3플레이어 커뮤니티 사이트인 ‘엠피메이트(http://www.mpmate.com)’에 ‘아이리버 화이트노이즈 문제 해결됐나요?’라는 글이 올라왔다. 올해 초 불거진 아이리버 일부 모델의 ‘화이트노이즈’ 문제가 결함제품 교환조치와 함께 사그라지는 시점이었다. 이 글은 수많은 답글을 양산하며 사태를 다시금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특히 한 사용자가 ‘이 문제는 칩의 근본적인 결함 때문’이라는 내용을 실증적으로 밝혀내면서 레인콤 대표이사의 공식 사과와 이상제품 전면교체 약속을 받아내는 성과를 낳았다.
브랜드를 최대가치로 여겨온 아이리버의 이미지에 큰 타격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한번 호되게 당하기는 했지만 아이리버는 이 같은 폐인들을 잘 활용하는 회사로 꼽힌다. 초창기부터 꾸준히 소비자를 대상으로 필드 테스트와 의견 취합을 하면서 제품 개선에 반영해 왔다. 출시한 제품에 문제가 있다면 이를 수거해서 분석을 하고 최대한 빠른 피드백을 나타내는 모습이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여 결국 업계 선두가 된 것이다.
‘세븐폰은 세티즌이 단종시켰다’는 말도 휴대폰 유통시장에는 널리 회자된다.
가수 세븐이 광고해 세븐폰으로 널리 알려진 ‘애니콜 SCH-V410’은 휴대폰 커뮤니티 사이트인 세티즌닷컴(http://www.cetizen.com) 회원들의 뭇매를 맞았다. 음악 청취시 버튼 떨림 현상, 통화시 고주파 잡음 발생 등의 버그가 3∼4가지나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세븐폰 ‘조기 단종’으로 이어졌고 삼성 애니콜 신화의 최대 오점으로 지적되곤 한다.
이 밖에 SLR카메라 전문 커뮤니티인 SLR클럽(http://www.slrclub.com) 내 후지포럼이 지난해 ‘NO 후지 프로젝트’라는 안티운동을 전개하며 AS체계 개선을 강력히 요구해 본사 서비스총괄 책임자 등이 급거 방한해 문제점과 불만족 사례를 경청한 것도 좋은 사례다.
삼성전자 PC 제조부문 관계자는 “다나와, 용산닷컴 등 관련 사이트 모니터링이 주요 업무 중 하나가 됐다”며 “여기에 올라오는 각종 민원성 제보와 정보는 제품이나 서비스 개선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커뮤니티 업계 한 관계자는 “자사에 위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주장이나 제보의 글이 사이트에 등재되면 이를 삭제해 달라는 청탁성 요구가 제조업체들로부터 종종 들어온다”며 “그런 요청을 받아들인 적도 없지만 설령 삭제한다 해도 한번 일어난 네티즌의 원성은 걷잡을 수 없는 것이 커뮤니티 사이트의 생리이자 위력”이라고 강조했다.
◇신한류 바람을 일으키자=지난해 우리나라의 음식, 오락, 문화행사 등을 보기 위해 입국한 한류 관광객 수는 전체 입국자 535만명의 20%에 달하는 117만명. 특정 연예인을 만나거나 촬영장 등을 방문한 순수 한류 관광객은 23만명으로 추산된다.
한국 문화를 보고 자란 다음 세대의 아시아권 젊은이들을 한국 문화와 한국 상품을 사랑하는 ‘한국 애호가’로 만들겠다는 신한류 전략이 점차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일본 NHK에서 방영돼 큰 인기를 얻은 드라마 ‘겨울연가’는 경제적으로도 수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해내고 있는 좋은 사례다. NHK로부터 4억4000만원을 받고 ‘겨울연가’를 수출한 제작사 팬엔터테인먼트는 순수제작비 20억원의 약 13배인 260억원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인기는 관광산업으로 이어졌다.
최근 강원도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남이섬, 중도 등 ‘겨울연가’ 촬영지는 연간 최소 110억원 이상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식사비용과 기념품 판매수익을 포함하면 최소 160억원 이상의 소득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연가’는 OST 80만장, DVD가 30만장 팔리는 등 일본 내에서 2000억원 규모의 유통 시장을 생성하기도 했다. 드라마 OST를 수출한 예당엔터테인먼트는 도쿄 MX TV에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중인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의 주제곡인 이수영 앨범에 이어 10월 방영 예정인 ‘아름다운 날들’과 ‘천국의 계단’ OST도 수출할 예정이다.
한류 열풍은 콘텐츠와 관광 산업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한류 스타들을 내세운 광고가 크게 어필하면서 현지인들에게 우리 제품에 대한 친근감을 안겨주고 있다.
휴대폰 전문 제조업체인 VK모바일은 영화 ‘엽기적인 그녀’로 동남아를 사로잡은 배우 전지현을 내세워 올 상반기에 전년 동기 대비 40%의 매출 신장을 기록했다. 화장품 회사인 태평양도 전지현 광고에 힘입어 올 1분기 중국에서 지난해 동기 대비 2.5배 증가한 640만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주의할 점은 과거 국내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홍콩 영화나 미국 가수 ‘뉴키즈온더블럭’처럼 한류도 한 순간의 유행으로 지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기회도 왔을 때 잡아야 한다.
마침 한국관광공사는 한류기획단을 설립하고 2004, 2005년을 ‘한류관광의 해’로 지정해 한류를 일시적인 물결이 아닌 고정적인 국가수입원으로 만들기로 했다. 10월에는 미주 최초의 한류상품도 출시한다고 한다.
외국기업에 대한 반감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한다는 점에서 ‘한류 열풍’은 분명히 우리에게 큰 기회다. 우리 기업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해외의 한류 폐인들을 공략한다면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정진영기자@전자신문, jychung@etnews.co.kr
◆기고
폐인 신드롬 이렇게 해보자
-가격비교사이트 다나와 정세희 팀장 mshuman@danawa.co.kr
‘품질 평가단 모집, 필드 테스트 이벤트’
온라인 커뮤니티 상에서 눈에 자주 띄는 글귀다. ‘제목:[필테]OOO사용기’와 같은 제목으로 게재되는 글들은 간단한 소감을 넘어 제품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분석을 내포하고 있다. 조금 더 나은 제품을 찾기 위해 상품을 구입하고 되팔면서 관련 지식을 학습하는 이들 소비자는 ‘마니아 집단’ 혹은 ‘필드 테스트 폐인’으로 불린다.
과거에는 제조사나 매체를 통한 정보 습득이나 특정 소모임을 통한 정보 교류가 전부였다. 때문에 소비자는 굳이 치르지 않아도 될 시행 착오를 많이 겪었고 제조사도 안이한 자세를 보이기 쉬웠다. 하지만 이런 ‘폐인’이 양산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소비자 스스로 제품 평가를 하면서 기업의 매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글 하나가 뭐 그리 큰 대수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내용을 보면 상당한 논리가 있고 인터넷의 속성상 ‘퍼 나르기’를 통해 광범위하게 확산되므로 기업이 열심히 세운 이미지가 한 순간에 실추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많은 업체가 온라인 모니터링 요원을 두면서까지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제품 만들기가 무서워 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폐인들은 철저하게 소비자 입장에서 제품에 대한 개선 방향을 제시하고 기업과 소비자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보이지 않는 가치도 지니고 있다. 때문에 대기업들은 자체 평가단을 운영하고 연구소 차원에서 비공개 테스트를 한다.
세계적인 입지를 가진 한 ODD 제조사도 제품 출시 전에 꼭 필드의 의견을 받고 있다. 출시 후에 나쁜 평가를 받아 기업 이미지와 매출 하락을 겪기보다는 사전에 폐인에게서 흠씬 두들겨 맞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폐인 신드롬’의 보이지 않는 가치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제품을 ‘명품’으로 만들고 마케팅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하나가 된다는 ‘프로슈머(ProSumer:Producer+Consumer)’ 시대도 앞당겨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