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크·그레이 제품 확산 원인과 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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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크 및 그레이 제품의 유입이 그치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정품과의 가격차 때문이다. 가격차가 발생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벌크 제품은 대량거래를 조건으로 하기 때문에 본래 가격이 저렴할 수밖에 없고, 더욱이 해외에 수출되는 물량은 내수용보다 단가가 낮다.

 ◇각종 ‘깡’이 출발선=구조적인 가격차 외에 이른바 ‘깡’으로 불리는 각종 할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신용카드 할인과 어음할인 등은 이미 알려진지 오래됐고 최근 들어서는 ‘신용장할인(일명 LC깡)’ 마저 자주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LC할인이란 LC는 개설할 수 있지만 현금 및 판매력이 취약한 업체가 LC를 열어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업체에 제품을 공급해주고 제품값보다 2∼4% 적은 현금을 받아 사용하는 현금확보 방법의 일종이다. 이를테면, 10억원의 LC를 열어 제품을 수입해 공급하고 9억5000만원의 현금을 받아 사용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내수 불경기가 지속되면서 현금이 달리는 업체들이 LC할인을 주도, 할인율이 최근 6%까지 올랐다. LC할인은 현금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존에도 있었던 것이나 통상적인 할인율이 3∼4%였던 점을 감안하면 두 배 가까이 오른 셈이다. 불황으로 인한 업체들의 자금난이 심각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LC할인 외에도 만기 이전의 어음을 유통시켜 현금을 조달하기 위한 ‘어음할인’, 신용카드로 물건을 구매한 것처럼 매출전표를 끊고 현금을 빌려쓰는 ‘신용카드 할인’, 물건을 담보로 현금을 빌려쓰는 ‘견질’ 등도 벌크 및 그레이 제품의 양산을 촉진하는 요소들이다.

 이 같은 할인을 통해 유통되는 품목은 현금화하기 쉬운 중앙처리장치(CPU)·ODD 등이 주종을 이룬다.

 한 CPU유통업체 관계자는 “벌크및 그레이 제품 수입업자들은 각종 할인을 통해 정식 수입제품보다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고 정품 취급업체들은 이에 대응키 위해 가격을 경쟁적으로 내리다보니 가격질서가 무너지기 일쑤”라고 밝혔다.

 실제로 최근 CPU를 비롯한 광저장장치 등의 그레이 제품 유입이 계속되고 있으며, 정식 채널을 통한 제품에 비해 적게는 10%에서 많게는 50% 가량 가격이 싸게 유통되고 있다.

 이 관계자는 또 “LC할인이나 어음할인·견질 등은 할인율이 커서 하면 할수록 손해가 누적되기 마련이지만 당장의 유동자금이 아쉬운 업체들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고육지책”이라고 말했다.

 ◇대응방안 없나=벌크 제품은 비정상적인 루트로 유통되는 것일 뿐, 전자파검사만 받았다면 법적인 하자가 없다. 오히려 동일한 제품이지만 가격이 저렴해 소비자 입장에서는 유리하다는 지적도 있다.

 문제는 이들 벌크 때문에 유통질서가 혼란스러워진다는 것. 벌크 가격에 소비자 눈높이가 고정되기 때문에 정상적인 유통업체 역시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들 벌크 수입상을 추적하거나 물량을 막을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도 없어 정상 유통업체들의 고심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수요 활성화에 한가닥 기대=일각에서는 벌크 제품이 침체된 수요를 살리는 활력소가 될 것이라며 기대하기도 한다. 실제로 15만원을 호가하던 DVD리코더는 10만원 초반의 벌크제품 등장이후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파이오니아 벌크제품 공동구매에 서버가 다운될 정도로 주문이 폭주했는데, 이는 잠재수요를 대변한 것”이라며 “DVD리코더 가격이 10만원 초반으로 떨어질 경우 연말에는 월 2∼3만대 규모까지 늘어날 가능성도 높다”고 내다봤다.

 박영하·정은아기자@전자신문, yhpark·eaj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