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J 퀸넬의 소설 ‘맨 온 파이어’를 영화화 하기로 생각한 사람은 할리우드의 독립영화 제작자 아논 밀천이다. 그가 제작한 영화의 목록을 보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테리 길리엄의 독특한 SF 영화 ‘브라질(국내에서는 ‘여인의 음모’라는 제목의 비디오로 출시)’, 셀지오 레오네 최후의 걸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마틴 스콜세지의 ‘코미디의 왕’, 올리버 스톤의 ‘J.F.K’를 비롯해 ‘프리윌리’ ‘의뢰인’ ‘L.A컨피덴셜’ ‘데블스 에드버킷’ ‘네고시에이터’ ‘파이트 클럽’ 등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아논 밀천이 ‘맨 온 파이어’의 감독으로 선택한 사람은 토니 스콧이다. ‘탑건’으로 흥행 감독이 된 후 그는 ‘폭풍의 질주’ ‘마지막 보이스카웃’을 만들었고 타란티노의 각본을 영화화 한 ‘트루 로맨스’, 잠수함 영화 ‘크림슨 타이드’, 그리고 ‘더 팬’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등을 만들었다.
‘맨 온 파이어’는 토니 스콕 감독의 영화 중에서 가장 스타일이 화려한 작품이다. 너무 스타일이 강조돼서 오히려 내러티브가 약화되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전직 CIA 암살 전문 요원으로서 과거의 상처에 시달리며 알콜중독자가 된 크리시(덴젤 워싱턴 분)가 친구인 레이번(크리스토퍼 월켄 분)의 도움으로 멕시코로 가서 대부호 라모스의 딸인 피타(다코타 패닝 분)의 보디가드가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맨 온 파이어’는 복수극에 초점이 맞춰졌다.
영화의 전반부는 피타와 크리시의 교감을 다룬다.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크리시도 피타의 천진하고 귀여운 모습에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 드디어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된다. 멕시코시티에서는 어린이를 납치한 후 몸값을 요구하는 유괴가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라모스 부부는 딸 피타의 보디가드로 크리시를 고용한 것이다.
그러나 용의주도한 크리시지만 부패한 경찰관까지 가세한 납치범들에 의해 피타를 유괴당한다. 납치범들과의 총격전에서 경찰관 2명을 살해하지만 크리시도 치명적 부상을 입는다. 영화의 후반부는 협상이 결렬되고 납치범들이 피타를 살해한다고 통보하자 크리시 혼자서 처절한 복수극을 펼치는 내용이다.
‘맨 온 파이어’에서 돋보이는 것은 토니 스콧 감독의 화려한 스타일과 ‘트레이닝 데이’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덴젤 워싱턴과 ‘아이 엠 샘’의 뛰어난 아역배우 다코타 패닝의 존재감이다. XL카메라와 16㎜ 카메라를 사용해 다른 질감의 필름들을 뒤섞어서 편집을 했고 특히 조명이나 색채 노출 등에서 여러 가지 변화를 주어서 스타일리시한 영상을 만들어냈다.
비전형적인 촬영기법이나 편집 스타일이 너무 튀지 않고 시간적 흐름을 따라 전개되는 내러티브와 전체적으로 융합되는 이유는 전적으로 토니 스콧의 연출력 때문이다.
자신의 배역을 능력 이상 펼치는 두 배우 이외에도 미키 루크나 크리스토퍼 월켄 등 왕년의 명배우들이 병풍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역시 중심에 있는 두 배우는 화려한 스타일로 시선을 빼앗기지 않게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준다. 특히 크리시와 피타가 서로 내적으로 교감하기 시작하는 수영장 신에서는 굳이 연출이 필요 없을 정도로 두 배우의 몰입은 뛰어나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야기의 허리가 잘려져 있다는 것이다. 극적 구성이기는 하지만 크리시와 피타의 교감이 이야기의 끝까지 지속되지 못한 것은 구성상의 실수다. 반전이나 극적인 전개를 위한 장치보다 차라리 어린 소녀와 보디가드 사이의 정신적 교감이 지속되도록 장치하는 것이 훨씬 좋을 뻔 했다.
‘레옹’처럼 킬러를 소재로 한 로리타 콤플렉스의 변형이 아니냐고 항의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피타가 화면에서 사라지면서 이야기는 복수극 위주의 액션 영화로 변질되는데 영화적 힘은 오히려 떨어진다.
<영화 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 s2jazz@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