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백원인 미라콤아이앤씨 사장(1)

88 서울올림픽이 개최되기 일년 전 당시 다니고 있던 현대전자, 지금의 하이닉스반도체에서 나는 이십대 후반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회사에서 담당했던 업무는 생산관리. MES(생산관리 시스템)를 IBM 플랫폼에 직접 개발해 실제 반도체 조립가공 생산공장에 적용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급여는 줄곧 쌀값과 비교가 되곤 했는데 고작 쌀 4-5 가마 정도를 사면 전부였기 때문에 많은 샐러리맨들이나 기업인들 모두에게는 생활이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자녀 수를 늘리면 세제혜택까지 주는 시대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산아제한캠페인을 비롯해 빈곤퇴치를 위한 여러 국가정책이 수립되던 때였다. 국내의 어려운 상황에 대한 타개책으로 이 때 많은 사람들은 이민을 가거나 해외 시장개척을 위해 섬유산업이나 전자산업, 중공업, 조선, 그리고 특히 자동차산업에서 해외 시장의 문턱을 수없이 두드렸다.

나름대로 회사생활에 보람을 가지고 일하고 있었지만, 나는 나의 꿈을 해외시장에 두고 있었다. 당시 나는 이 가난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기술개발에 있다고 믿었다. 반도체 기술은 거의 해외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무조건 외국에서 기술을 사올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 공정기술은 그간 닦아온 기술력이나 우리 국민이 지닌 근면함, 우수한 지적 능력, 그 어느 것을 비교해도 선진국 수준에 겨루는데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반도체를 가공하는 원시 기술 중 설계기술과 장비 및 설비기술은 무조건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에는 반도체기술에 대한 표준을 제정하고 또한 무역전시와 기술 심포지엄을 통해 그들의 무역을 확대하고자 하는 기관인 미국반도체협회(SEMI)라는 기관이 있었다.

나에게 이러한 국제기관은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관이나 세계관과 맞아 떨어지는 아주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후 나는 일본 도쿄에 본사를 두고 있는 미라콤인터네셔널에 입사해 미국반도체협회의 전시회와 기술 심포지엄 등을 일본과 한국에 유치함은 물론, 그것을 통해 반도체기술이 한국에 우선 적용이 되도록 하는 일을 시작했다.

일주일간의 휴가를 얻어 한달 급여를 손에 쥐고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이벤트사업이었지만,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일본 도쿄에 있는 하코네 박람회장을 찾았다. 무작정 세미콘 재팬 ’87 행사장을 찾아가 미국에서 온 협회관계자와 일본 주최측 관계자를 찾아가 분주히 제안설명을 했다.

한번도 경험이 없었던 무역전시회 제안이었지만, 주최자의 입장을 고려해 준비한 제안설명회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자리였다. 이들의 반응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아 포기를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 기술진들의 기술홍보와 이를 습득하기 위해 찾아온 많은 엔지니어와 참관객들의 그 진지함과 열성에 감동했고, 나 역시 하나라도 더 배워가기 위해 열심히 행사장 구석구석을 찾아 다녔다.

wonin@miraco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