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거기 있으니까요(Because it is there).”
영국 산악인 조지 말로리는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하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대답한다. 다시 내려 올 산을 굳이 갖은 고생을 하며 오르는 이유는 오직 산에 오르는 자만이 알 수 있다.
한글 사랑에 관한 한 누구 못지않은 열정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한글 사랑과 한글 정보화에 푹 빠진 이유도 대개 비슷하다. 우선 한글이 거기 있었다. 이들의 한글 사랑은 정보화와 만나면서 한글의 세계화라는 결코 쉽지 않은 도전으로 새록새록 쌓인다.
휴대폰 대신 손전화라는 말을 애용하는 최기호 한국어정보학회장(62·상명대 교수)은 요즘 ‘한글의 세계화’라는 화두에 몰두하고 있다. 특히 몽골을 비롯한 동북아 지역에 한글을 보급, 전파하는 일과 남북 IT용어 통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지난 2일에도 몽골에서 열린 한글보급 행사인 ‘한글 큰 잔치’를 성공적으로 끝냈다. 그의 한글 사랑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수 있다.
“몽골에서 올해 처음 개최한 행사인데 천여명이 몰렸습니다. 컴퓨터 자판 빨리 치기 대회도 있었는데 반응이 아주 대단했어요.”
지금은 고인이 된 공병우 박사가 설립한 한글문화원에 출입하는 제자들을 지도하다 한글 정보화에 눈을 떴다는 최 교수는 이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글정보화에 관한 한 청년 못지않은 열정을 갖고 있다. 특히 동북아시아 지역의 한글 보급에 애착을 갖기 시작하면서 ‘한글의 세계화’에 여러가지로 많은 궁리를 하고 있다.
최 교수는 통일에 대비해 남북 IT용어를 표준화하는 일을 IT분야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추진해야 할 과제로 꼽았다. 오는 12월 말 중국 심양에서 북한 학자들과 세미나도 갖는 것도 이의 일환이다. 남북 IT용어 통일과 한글의 동북아 수출에 매달리고 있는 최 교수를 보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실감한다. 나이를 먹어야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잃어 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기게 된다.
영어 콘텐츠 등 교육용 솔루션 업체인 아리수미디어의 이건범 사장(40)은 한글지킴이 단체 중 하나인 한글문화연대 활동을 하면서 한글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현재 그는 한글 문화연대의 대변인이라는 직함도 갖고 있다. 회사 이름인 ‘아리수’는 고어로 한강을 뜻한다. 영어 콘텐츠(일부 이지만)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그가 한글 관련 단체에 몸 담고 있는 것이 조금은 의외다. 아니나 다를까.
“사실, 처음에는 사업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한글 사랑운동에 참여하는게 사업에는 별로 도움이 되진 않더군요. 대신 한글에 대해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사랑을 갖게 된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어요. ”
한글과 컴퓨터가 찰떡 궁합이라는 사실을 오래전에 간파한 그는 운동권 출신의 386세대다. 옥중 생활 당시 로망 롤랑의 ‘매혹된 영혼’을 읽고 고통을 이기는 힘을 배웠다.
“고통은 오래 가슴에 남아 있지요. 하지만 고통을 이기려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얻는 희열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양왕성 한글과 컴퓨터 기술이사(37·CTO)는 한글 정보화의 최일선에 있는 사람이다. 아름다운 글꼴을 만들고 사용하기 편리한 워드 프로세서를 만드는, 결코 쉽지않은 일을 그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개발자는 주연보다는 조연에 가깝다. 제품을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밤낮을 잊고, 때로는 식음을 전폐하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제품이 세상에 선을 보이는 순간 그동안의 고통은 허공으로 날라가 버린다. 제품 개발이 끝났다고 해서 긴장의 끈을 늦출 수는 없다. 또다시 새로운 제품 개발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개발자는 늘 스스로에게 칼날을 세우는 진검승부를 펼쳐야 하는 법이다. 결코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하는 여정, 어쩌면 그래서 평생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양 이사는 지난 91년 한컴에 입사한 이래 늘 ‘아래아한글’과 함께 있었다. 새로운 버전의 ‘아래아한글’을 개발할 때마다 모든 정열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처음으로 팀장을 맡아 개발했던 ‘아래아한글 2.5’에 가장 애착이 간다는 양 이사도 한글문화원을 드나들면서 한글 정보화와 연을 맺었다. 한글의 세계화를 위해 사라져 버린 고어 등을 되살리는 등 한글의 표기 방법이 보다 넓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는 “한글이 없었으면 이처럼 빠르게 IT강국 코리아를 이룰수 없었을 것”이라면서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한다.
한컴에 입사하기전 ‘DKBY’라는 공개 소프트웨어로 성공했듯, 그리고 한컴에 들어와 ‘아래아한글’로 성공 했듯, 이제 아래아한글을 세계에 널리 퍼뜨리는 것을 그는 마지막 성공으로 생각하고 있다.
주시경 선생은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고 했다. 당연히 한글 정보화가 올라야 IT강국 코리아도 오를 것이다. 9일 한글날을 맞아 한글 정보화에 힘쓰는 이들 3인방을 보면서 왠지 마음 한편이 푸근해진다.
방은주기자@전자신문, ejb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