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봉의 영화사냥]2046

왕가위는 비극적 허무주의자다. 그의 인물들은 이 지상에서 절대 행복하지 않다. ‘열혈남아’에서 ‘아비정전’을 거치며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중경삼림’ 그리고 그 속편인 ‘타락천사’와 무협 액션 ‘동사서독’에서도, 너무나 아름다운 비장미가 독소처럼 세포 속에 스며들어 빠져나가지 않는 ‘화양연화’에서도 이뤄질 수 없는 혹은 이뤄지지 않는 사랑에 절망하고 이 지상을 버린다.

홍콩의 타락한 도시 뒷골목을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며 흔들거리던 핸드헬드 카메라나, 툭 툭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던 스킵 프린팅 기법을 활용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그의 매력은 그러나 주제의 진중함을 가리지 않는다.

예술의 가장 좋은 상태는 내용이 그곳에 꼭 맞는 형식을 찾았을 때다. 왕가위는 항상 자신을 전위로 내세운다. 그의 실험은 이제 그가 더 나갈 수 없는 절벽 끝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믿고 있을 때 없는 허공에 발을 내딛으며 또 다른 절벽을 만들어서 이 지상에서의 삶을 연장시킨다.

‘2046’을 ‘화양연화’의 속편이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많은 부분들이 다르다. 그렇다고 해도 ‘화양연화’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많은 부분들이 같기 때문이다.

필자는 ‘2046’을 보면서 왜 그가 5년 넘는 긴 기간을 오직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매달렸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영화라는 허구적 구조물을 통해서 자신의 또 다른 삶을 재구성해보고 싶은 것이다.

마치 전지전능한 신이 그런 것처럼, 그는 절대자의 손으로 자신의 인물을 창조하고 그들을 사랑하게 하고 그 이별에 몸서리치며 상처받게 만든다. 국수통을 들고 비좁은 골목을 걸어가던 수리첸은 잠깐 밖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지만, 수리첸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수리첸(공리 분)이 등장해서 차우(양조위 분)의 마음을 뒤흔든다.

‘2046’은 ‘화양연화’에서 양조위와 장만옥이 밀회를 했던 방의 번호이면서 동시에 홍콩의 중국반환이 완성되는 시점이다. 1997년 중국에 주권이 이양된 홍콩은 향후 50년동안 1국가 2체제를 이어가기로 했기 때문에 예전의 방식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2046이 되면 홍콩은 중국의 한 도시에 불과하게 된다. 왕가위가 선택한 2046이라는 숫자에는 또 다른 정치적 의미가 숨겨 있는 것이다.

왕가위는 ‘2046’에서 인물들을 프레임의 끝으로 자꾸 밀어 넣는다. 그는 좌파인가? 특히 왼쪽 구석 끝으로 인물들을 몰아세우고 있다. 따라서 중앙의 풍부한 여백은 이상하게 쓸쓸한 여운을 남기며 인물의 정서를 표현한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보이는 부분보다 더 큰 것이다.

1966년부터 1969년까지의 크리스마스 이브, 매년 12월 24일을 중심으로 차우가 머물고 있는 동방주점, 즉 오리엔탈호텔을 배경으로 그가 만나고 헤어지는 여인들이 등장한다. 자살한 루루, 호텔 주인의 딸(왕정문 분) 그리고 2046호에 살고 있는 매혹적인 여인(장쯔이 분), 또 도박장에서 만난 수리첸(공리 분) 등이 차우의 주변에서 명멸한다. 그 핵심은 여전히 2046이다. 루루는 2046호에서 자살했고 그 방에는 장쯔이가 살고 있다.

또 ‘2046’에는 하이 앵글이나 로우 앵글 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카메라는 아이 레벨 쇼트, 우리의 눈높이와 비슷하게 찍혀져 있다. 그러면서 왕가위는 그 인물들을 대부분 클로즈업 쇼트로 바라본다.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서 우리들이 오직 자신의 인물에게만 몰입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한다.

<영화 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 s2jazz@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