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천지인(1권, 2권, 3권), 이기열 지음/전자신문사 펴냄/각권 8500원
삼성전자 애니콜의 문자입력시스템 ‘천지인(·, ㅡ, ㅣ)’이 대단히 과학적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세 글자 즉, 점 하나와 작대기 두 개로 인간이 발음할 수 있는 모음이란 모음은 다 조립할 수 있으니 이만큼 과학적인 입력시스템이 있을까. 올 가을 우리의 한글이 디지털 시대 총아라는 휴대폰과 함께 소설 속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장편 ‘소설 천지인’은 세계 최대 휴대폰 생산국이며 최대 수출국 중 하나인 우리나라의 휴대폰 신화 속에 꽃핀 한 벤처기업가의 파란만장한 성공 스토리와 한글을 디지털 시대에 세계로 수출하자는 내용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작가는 천지인시스템이 삼성전자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이 그렇다. 천지인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고안해낸 한글 창제의 기본 원리라고 훈민정음해례본에도 명시돼 있다.
“천지인은 통신의 기본요소라 할 수 있다. 전파가 통하려면 양극과 음극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하늘과 땅이다. 여기에 메시지를 실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통신은 실현된다. 결국 천지인은 한글 창제의 기본 원리요, 통신의 기본 요소라는 의미에서 이 제목을 붙였다.”
작가는 총 3권으로 나눠 휴대폰과 한글의 역학 관계, 음성과 문자의 중간 언어로서의 한글의 위대성을 묘사했다. 한글을 중간 언어로 사용하면 세계 어느 나라 말도 자동 통역·번역이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이처럼 소설 천지인에서는 천지인과 한글 수출 문제가 많이 조명되지만 주된 이야기 전개는 어디까지나 벤처 기업가의 성공 스토리여서 읽는 재미를 더한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치열한 삶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맨손으로 창업해 기업을 일구고 대기업과 경쟁하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뻗어 나간다는 게 언뜻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풀어냈다.
삐삐의 붐과 함께 국내 이동통신시대가 개막되던 시기, 주인공 백승민은 벤처기업가의 꿈을 갖고 무일푼으로 문자삐삐 개발업체를 창업한다. 그리고 10년 만에 1조원 매출이라는 세계적 휴대폰 기업으로 키운다. 기술경영·투명경영의 ‘정도 경영’을 고집하는 그는 위기 때마다 뛰어난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며 제2의 노키아 드림을 위해 계속 전진한다.
그러던 중 한글 연구가인 신영욱 교수를 만나게 된다. 신 교수는 한글의 좌자우모, 천지인시스템, 그리고 단일 표음문자라는 특성이 디지털시대에 가장 적합한 문자임을 입증하는 것이라며 국내 휴대폰업체들이 이러한 한글을 세계로 수출하는 데 선봉에 서야 함을 주장한다. 이로서 백승민에게는 또 하나의 사명감이 주어진다. 중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그에게는 또 하나의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선의의 경쟁 , 성공과 실패, 배신, 검은 돈, 산업스파이, 덤핑전쟁 등 기업계의 비화들을 사실감 있게 그리고 있는 소설 천지인은 자수성가한 한 벤처 기업가의 성공담이자 세계적인 휴대폰 왕국을 건설한 국내 이동통신업체의 자전적 이야기다. 또한 한글이라는 우리의 문화유산이 세계적인 디지털 유산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리고 있다. 즉, 문자와 음성이 융합하는 디지털 시대에 문자·음성의 융합이 어려운 중국의 한자 같은 문자에 한글을 발음기호로 빌려줌으로써 디지털 혜택을 나누자는 원대한 꿈이 담겨져 있는 한국형 기업소설이다.
작가의 정보통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30년 가까운 세월을 월간 ‘정보와 통신’의 편집장으로 일하며 정보통신과 변화의 발걸음에 동참했다는 냄새를 짙게 풍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는 사실적 경험과 제언을 찾을 수 있다. 그가 95년 집필한 ‘소리없는 혁명’은 우리나라 정보통신 발전 비사를 정리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소설의 대부분은 픽션이지만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을 토대로 저술됐다.
실제로 경희대 정보통신대학원 진용옥 교수팀이 한글을 한자의 발음기호로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명승욱기자@전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