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은 멀다. 조경철선수가 상주하는 플스방은 더욱 멀다. 그 먼 거리를 가면서 나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행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수련을 쌓았던가. 선배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팀플레이에 져서 돈만 잃고 있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은 모두 훈련이었다.
여러 가지 포메이션과 패스를 연습하기 위해 선배들을 이용한 것! 이미 밝혔지만 선배들은 세상에 드러내기가 부끄러운 실력이라 다양한 실전 연습 대상으로 가능하다.
우하하하. 그것도 모르면서 김X훈 선배는 자신이 너무 일방적으로 이긴다며 미안해했다. 별 말씀을. 또 한 수 지도를 받기 위해 찾아간 모 게임업체의 관계자는 진짜 대단한 실력이었다.
지금까지 ‘위닝일레븐’의 캐릭터가 실제 살아있는 선수라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 사람은 도저히 인간의 컨트롤이라고 믿기 힘든 신기를 보여줬었다. 이 모든 연습과 훈련을 머릿 속으로 상상하며 조 선수의 브라질팀을 가상으로 만들어 맞섰다. 그리고 다짐했다.
‘아, 이번에도 지면 은퇴해야지.’“안녕하세요. 또 만났네요.”
“하하하, 잘 오셨습니다.”
왜 나만 보면 웃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조 선수는 활짝 미소 지으며 반갑게 맞아 줬다. 자신감 넘치는 태권도 사범의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이번엔 좀 다를 겁니다. 연습을 좀 했죠. 제가 개인적으로다가 연습을 좀 좋아해서요.”
“우하하하,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그리고 우린 바로 시합에 돌입했다. 긴 말은 필요없다. 고수는 오직 실력으로 말할 뿐이다…라고 말하고 싶으나 상대는 프로게이머다. 정상적으로 싸워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은근히 정신적 압박을 줬다.
“이번에도 지면 전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고 다녀요.”
“주변 사람들이 저한테 내기를 걸었어요. 제가 오대영으로 지는 걸루다가.”
“포토샵으로 조경철씨 얼굴을 골룸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아시죠?”
솔직히 기자가 생각해도 이건 숫제 협박이었다. 과연 통할까? 역시 안 통했다. 한 문장 읆을 때마다 웃으며 넘기더니 대뜸 게임 타이틀을 삽입하고 플레이를 시작했다. 어, 이런. 준비도 안 했는데. 정신적 데미지는 오히려 기자가 먹었다.
그런데 조 선수는 계속 고집하던 브라질이 아니라 레알 마드리드를 선택하는 게 아닌가. 난 당연히 항의했다. 이렇게 하시면 곤란하다, 브라질을 대비해서 훈련한 난 뭐가 되는지, 실제 축구 경기에서 한국 대 일본이 갑자기 한국 대 우간다로 바뀌는 경우는 없지 않느냐는 등 온갖 억지를 부렸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만두자, 더 이상 비참해지지 말자.’
이렇게 마음먹으니 오히려 편안해졌다. 상대는 국내 최고수고 기자는 변방의 북소리만큼의 실력도 안 된다. 그동안 열심히 연습했으니 최선을 다하는 모습만 보이고 장렬히 전사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조 선수는 레알 마드리드를 선택하고 기자는 프랑스를 골랐다.
프랑스의 앙리는 역시 대단했다. 큰 키와 유연한 근육, 탁월한 골 감각으로 몸싸움에서 안 밀려 문전까지 치고 나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를 십분 활용해 피레스가 찔러주는 스루 패스를 받아 수비수 한명을 제치고 강슛을 날렸다.
공은 정확히 골네트의 모서리에 꽂혔고 먼저 선취점을 올렸다. 전반 5분경에 골을 먼저 넣었으니 너무 좋아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악 소리가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조 선수의 표정을 살펴봤다.“잘 하시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하는 조 선수의 공격은 말과 달리 매섭게 시작됐다. 호나우두를 이용해 현란한 드리블을 구사하는가 하면 라울의 수비수 교란 작전으로 브라질의 포메이션을 구겼다. 간신히 막았는가 싶으면 뒤를 받치는 선수가 어느새 등장해 공을 뺏아 공격 작업을 계속해서 퍼부었다.
전반전 15분 동안 플레이하면서 기자가 하프라인을 넘은 것은 단 두 번. 기자는 끊임없이 가해지는 공격의 흐름을 차단하기 위해 백태클을 감행했다. 어쩔 수 없는 일. 얄미운 심판은 어김없이 노란 카드를 빼들었고 상대에게 프리킥 찬스를 줬다.
골대와는 약 15미터 거리. 충분히 직접 슛을 날릴 수 있는 자리다. 조경철 선수는 카를로스에게 기회를 줬고 반대편 문전을 향해 강력한 왼발 슛을 때렸다. 총알처럼 날아간 공은 골대의 위쪽을 맞고 튕겨져 나와 버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바람처럼 나타난 베컴이 리바운드를 하며 헤딩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크윽, 그럴 줄 알았다. 프로게이머에게 프리킥 찬스를 준 것이 잘 못이었다.전반전은 겨우 동점으로 마무리했으나 후반전에서 조 선수는 포메이션에 약간의 변화를 줬다. 호나우두와 라울의 자리를 바꾸고 지단을 가운데로 끌어 들여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기자가 선택한 프랑스에도 지단은 있지만 레알 마드리드에도 지단이 있고, 프랑스의 지단은 어리버리한 플레이를 했지만 레알 마드리드의 지단은 펄펄 날았다.
조 선수는 미드필드를 완벽하게 장악했으며 공격과 수비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기자의 모든 패스를 사전에 차단했다. 레알 마드리드의 지단은 숱한 찬스를 만들어 최전방의 라울과 호나우두에게 연결했고 결국 후반 시작 5분 만에 또 한골을 먹고 말았다. 이번에도 골키퍼의 키를 살짝 넘기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패스트 로밍 슛이었다.
그래도 2대1이면 괜찮은 성적이라고 생각했으나 이런 마음이 문제였다. 수비에 치중하면서 역습을 노렸으나 그런 널널한 작전이 통할 상대가 아니였다. 기자는 피레스를 깊숙이 침투시켜 상대 문전을 향해 몇 번의 센터링을 올렸으나 제대로 된 헤딩을 하지 못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3번째 골은 8분 만에 터졌고 4번째 골은 13분경에 나왔다. 조 선수는 골키퍼에서 시작되는 딱 세번의 다이렉트 패스로 최전방 공격수에게 공을 주는 작전을 구사해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축구가 무슨 농구도 아니고 어떻게 저런 패스와 공격이 가능한지 불가사한 일이었다.“도전을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새로운 전술과 기술을 계속 사용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플레이 스타일을 익히세요. 그게 바로 고수입니다.”
경기를 끝내고 조 선수는 기자의 플레이가 너무 고정돼 있다며 ‘위닝일레븐 8’의 다양한 기술을 알고 있다면 이를 실전에서 적극적으로 응용하면서 계속 연습하라고 충고했다. 플레이를 시작하면 상대를 이기기 위해 익숙하고 안정된 플레이로 치우치는 경우가 많은데, 패배를 두려워하지 말고 항상 도전하는 마음으로 단련하라며 자세히 설명해줬다.
이왕 만난 김에 몇 판 더 하려고 했으나 조 선수의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 게임은 더 이상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 시간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한판 뜨기로 다짐하며 우린 헤어졌다. 조 선수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과 겸손한 자세, 뜨거운 열정, 승리에 대한 의지를 지닌 진정한 고수였다. 인정한다, 조경철 선수. 내가 졌다!
<김성진기자 김성진기자@전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