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휴대폰 애니콜 탄생 10돌](상)과거

삼성휴대폰 대표 브랜드인 ‘애니콜’이 올해로 탄생 10년을 맞았다. 애니콜로 대변되는 한국 휴대폰은 이후 급속한 성장세를 거듭, 올해 처음으로 자동차를 제치고 수출 2위 품목의 자리를 꿰찼다. 내년 초에는 수출 1위 품목인 반도체마저 제치고 명실상부한 코리아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삼성휴대폰이 일등공신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삼성휴대폰은 10년 동안 눈부신 성장세를 거듭, 매출부문서 모토로라의 벽을 넘어 노키아에 이어 글로벌 2위에 올라섰다. 내년에는 판매량에서도 모토로라를 제치고 명실상부한 노키아와 양강구도를 형성할 전망이다. 삼성휴대폰의 대표 브랜드인 ‘애니콜 탄생 10주년’을 맞아 삼성휴대폰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3회에 걸쳐 집중 조명해 본다.<편집자>



“모토로라의 벽은 너무 견고해 보였습니다. 당시에는 삼성이 아니라 다른 어떤 기업도 전세계를 휩쓰는 모토로라 휴대폰을 앞서기는커녕 가까이 따라잡기도 불가능하다는 게 중론이었죠. 노키아와 에릭슨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회사 안에서는 물론 밖에서도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게 아니냐는 힐난을 받을 정도였죠.”

퇴직한 삼성전자 K씨의 90년대 회고다. 10년 전, 삼성 휴대폰의 모습은 정말 보잘 게 없었다. 10%대의 미미한 시장 점유율은 젖혀두더라도 K씨의 회고처럼 모토로라는커녕 노키아·에릭슨의 장벽이 너무 높았다.

그랬던 삼성 휴대폰이 일을 냈다. 10주 동안 눈부시게 성장했다. 국내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음은 물론 해외시장서도 매출액 기준으로 2위에 올랐다. 더욱이 고품질·고품격 휴대폰 시장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애니콜은 어느새 삼성 휴대폰을 넘어 한국산 휴대폰의 대명사가 됐다. 나아가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가 됐다. 88올림픽이 ‘코리아’의 존재를 알렸다면 삼성 휴대폰은 ‘IT코리아’란 브랜드 가치를 심는 일등공신이었다. 삼성 휴대폰이 소니 워크맨의 효과를 능가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삼성휴대폰의 역사=국내 휴대폰 시장은 지난 84년 우리나라에 제품이 첫 도입된 이후 매년 100% 이상의 성장세를 구가해왔다. 삼성전자도 지난 88년 국내 최초로 자체 개발한 휴대폰(모델명 SH-100)을 출시했다.

하지만, 수혜자는 미국의 모토로라였다. 모토로라는 당시 기술적으로 앞선 데다 다양한 제품 출시와 적극적인 마케팅 전략을 구사, 10여 년간 견고한 아성을 구축했다. 노키아·에릭슨 등도 만만찮은 전력을 과시했다. 모토로라는 특히 걸음마 단계인 국내 이동통신 시장에서 70%에 육박하는 독점체제를 구축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번 해보자’라는 논의가 삼성전자 내부에서 나온 게 지난 94년. ‘SH-700’를 새로 내놓아 시장 점유율 15%로 껑충 뛴 것. 이때 소비자가 기억하기 쉬운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 정공법을 취해보자는 논의가 터져 나왔다. 삼성은 마침내 94년 8월 ‘애니콜’이라는 브랜드를 내놓았다. 광고비도 전년보다 7배 많은 56억 원을 쏟아부었다. 그해 10월에는 첫 ‘애니콜’ 브랜드 휴대폰인 ‘SH-770’를 내놓았다.

◇모토로라의 “퇴조”= 삼성 휴대폰의 역사를 새로 쓴 것은 이듬해. 삼성전자는 이듬해 1월 ‘한국지형에 강하다’란 마케팅 구호 하나만으로 고객들의 뇌리를 파고들며 모토로라의 10년 아성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한국지형에 강하다‘는 슬로건은 삼성 휴대폰의 개발 개념을 한마디로 압축했다. 산악 지형이 많아 전파가 약한 한국지형에 강하도록 설계된 애니콜의 효용을 극대화하자는 취지였다. 강력한 마케팅과 결합하면서 1년 만에 시장점유율과 매출액에서 200% 이상 신장, 부동의 강자였던 모토로라를 끌어내렸다. 애니콜은 시장점유율 52%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고객 요구에 맞는 제품의 빠른 개발과 시의적절한 마케팅의 승리였다. 지난 96년 240g대의 외산제품보다 훨씬 가벼운 170g대의 최경량 휴대폰 ‘SCH-100’ 모델을 개발한 게 이를 방증한다. 이때부터 삼성휴대폰은 시장 점유율 50%대를 안정적으로 유지했지만, 모토로라는 10% 수준으로 급감했다. ‘애니콜‘ 브랜드로 밀어붙인 결과 불과 2년 만에 모토로라의 아성이 무너지고 ‘애니콜 신화‘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97년에는 아예 모토로라의 시장 점유율이 0%로 내려앉았다.

지난 97년 11월 PCS서비스가 시작되면서 시장은 급변했다. SK텔레콤과 신세기이동통신으로 양분됐던 이동전화 서비스시장에 3개의 사업자가 등장한 것이다. 당연히 마케팅 전쟁이 불붙었다. 삼성전자 애니콜의 마케팅 전략이 두 방향으로 갈라졌지만 내용은 같았다. ‘한국지형에 강하다‘라는 테마 아래 CDMA 신제품을 ‘디지털 애니콜‘로 브랜드화하고, 또 하나는 ‘작은 소리에 강하다‘란 테마를 내세워 기존의 이미지를 ‘애니콜 PCS‘에 그대로 전이시켰다.

브랜드 이원화의 비효율성이 지적됐다. 지난 98년에는 마침내 CDMA 제품과 PCS 제품을 묶어 ‘애니콜‘이라는 브랜드로 통합했다. 통합브랜드 전략을 펼치면서 그동안 애니콜 신화를 창조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던 ‘한국지형에 강하다‘는 브랜드 슬로건에서 애니콜의 자신감을 표출할 수 있는 ‘언제 어디서나 한국인은 애니콜‘이라는 새로운 브랜드 개념을 도입했다.

◇휴대폰업계 부동의 “지존”=삼성전자의 휴대폰 성장사는 브랜드 슬로건의 변화에 고스란히 반영했다. 시장 1위 자리에 오르기 전엔 ‘한국지형에 강하다‘는 다소 감성적인 슬로건이었다. 시장 1위에 등극하고선 ‘언제 어디서나 한국인은 애니콜’로 바꿨다.

지금은 ‘디지털 익사이팅 애니콜‘. 진정한 멀티미디어 모바일 시대를 견인하는 제품 이미지다. ‘한국인’이라는 말도 뺐다. 국내 독보적 1위 업체를 넘어 글로벌 선두업체의 이미지를 굳힌다는 전략을 숨겨놓았다.

박승정기자@전자신문, sjpark@

★어떻게 태어났나

 기업이 어떤 제품을 시장에 내놓을 때 가장 중시하는 게 브랜드명이다. 이른바 ‘브랜드 네이밍’ 과정이라 불리는 이 작업에는 거의 예외없이 CEO나 오너의 의중이 강하게 작용한다.

 삼성휴대폰 ‘애니콜‘은 조금 달랐다. 지난 94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가 봤다. 삼성은 그해 독자브랜드로 가기로 하고 브랜드 공모를 하기로 결정했다. 튀는 아이디어는 물론 국민적 관심사를 불러일으켜 삼성휴대폰의 홍보효과도 얻어보자는 취지였다. 사내 공모도 실시했다. 모두 5000여개의 아이디어를 접수했지만 사업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없었다.

 광고대행사인 제일기획에도 작명을 요청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후 3∼4곳의 전문업체에도 의뢰를 했으나 허사였다.

 공모와 전문업체에 의뢰한 결과 링크·팅커벨·핫라인·X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나왔다. 팅커벨은 화장지 회사 이미지로 활용돼 논의 대상에서 배제됐다. 링크는 너무 흔한 이미지의 단어였다. 바로 연결된다는 의미의 핫라인이란 아이디어도 나왔다. 당시 유행하던 X라는 단어를 차용, X콜이란 단어도 포함됐다.

 그러단 차에 당시 사업부장이던 오정환 전무가 제안한 이름중 ‘애니텔‘이라는 이름이 검토 대상에 올랐다. 격론 끝에 이를 브랜드로 하기로 잠정적으로 결정하고 상표권 조사를 추진했다. 동일한 상표는 없었다. 하지만 독점적 사용은 곤란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사업팀은 다시 회의를 했다. 이 회의에서 ‘애니콜‘이 어떠냐는 제안이 나왔다. 하지만 누가 ‘애니콜’이란 제안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회의중 나온 사안이어서 누구라 지칭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다 좋았지만 부정적인 이미지가 문제였다. ‘애니(any)’라는 접두사가 부정적인 뜻을 내포했다. ‘콜’이라는 단어 때문에 특정 직업과 연결시키는 해석도 있었다.

논란 끝에 결국 애니콜로 결정했다. 부정적인 뜻이 있다 하더라도 고품질 제품을 만들면 개선되지 않겠느냐는게 대부분 참석자들의 의견이었다. 더구나 콜이 누군가를 부르는 ‘전화’의 이미지를 갖고 있으니 어쨌뜬 좋은 게 아니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참석자 중 어느 누구도 이 이름이 불과 몇년후에 수조억원의 가치를 가질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애니콜 브랜드 값의 경우 지난해 기준으로 30억달러에 달한다는 게 정설이다.

막대한 브랜드 가치도 소중하지만 삼성전자에게 더욱 소중했던 것은 당시 사업팀이 가졌던 의지, 바로 ‘우리가 키워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