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오후, LG전자 강남빌딩에서 홈넷사업팀 박현(44) 상무와 ‘블랙티’를 마셨다. 기업 임원 방을 들락거리다 보면 녹차나 커피, 주스가 나오게 마련이지만 그의 방에서는 특이하게 블랙티가 나왔다. 블랙티를 마시다 보니 그가 귀국한 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은 미국통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미국과 한국기업을 두루 거친 그에게 기업의 연구문화의 차이를 물었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연구문화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기획안을 만드는 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들의 기획안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연구개발 기획안 내용만 봐도 무엇을 개발할 것이며, 어떤 사양을 넣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간략한 기획안을 만든 뒤 빠르게 연구개발에 착수하는 편입니다. 앞선 기업들을 따라 잡기 위한 차선의 선택인 셈이죠 .”
박 상무는 서울대 제어계측학과를 졸업한 뒤 6년간 LG전자의 전신인 금성반도체에서 근무했다. 이후 플로리다 주립대에서 컴퓨터공학을 공부한 뒤 벨연구소, 시스코 등을 거쳐 LG전자에 스카웃됐다. 스카웃 담당자는 전 LG전자 사장이었던 이희국 LG카드 사장. 루슨트와 시스코 등에서 근무하는 박 상무와의 잦은 만남이 급기야 한국으로 불러들이는 계기가 됐다. 박 상무는 한국에 귀국하면서 홈네트워크 부문을 맡았다. 홈네트워크 서비스에 대한 생각이 어떨까.
“킬러애플리케이션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킬러애플리케이션을 찾는 것보다 고객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이 홈네트워크 서비스의 기본 과제입니다.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박 상무는 홈네트워크 서비스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킬러애플리케이션을 찾기보다는 고객과의 인터페이스 문제에 고민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본다. 연령이나 성별, 지식수준에 구분없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 문제가 해결되면 홈네트워크 서비스는 보다 쉽게 실생활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등장한 ‘TV포털’개념도, 터치스크린, 웹패드, 통합리모컨 등도 모두 이러한 인터페이스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홈네트워크 서비스는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를 고민합니다. 가정학·심리학·행정학 등 다양한 학문이 접목되면서 인간 생활을 바꿔나갈 수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 어쩌면 삶에 대한 연구를 하는 분야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책을 한 권 추천해 달라고 하자 그는 거침없이 ‘하늘에서 내린 사랑’이라는 중국 관련 서적을 꼽았다. 그는 중국 문화혁명 이후의 중국 근현대사를 조명한 이 책을 통해 최근 한류에 대한 열기가 단순히 문화적 동경이 아닌 중국인 내부에 있는 오리엔탈리즘적인 회귀로 풀이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한류는 한순간의 유행이 아니라 문화혁명 이후 단절된 중국 원류를 찾는 과정이 된다. 참 독특한 해석이다.
김상룡기자@전자신문, sr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