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토종업체들이 어렵게 개발한 핵심제품을 국내 굴지의 통신서비스사업자들이 외면해 국내 통신장비·부품 업계가 고사 위기에 내몰렸다. 성능이 떨어진다면 모르겠지만 근거도 없은 호환성 문제 등을 내세워 외산 장비를 선호하는 바람에 사운을 걸고 개발해온 국산 통신장비업체들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주요 사례=광전송 장비개발 벤처기업인 아이티의 공비호 사장은 수년간 개발해온 다중서비스 지원 플랫폼(MSPP) 장비 사업을 접을 것인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국내 굴지의 통신서비스사업자인 A사에 장비를 공급하게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최종 단계에서 장비 공급업체로 선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A사가 공식 시험평가테스트(BMT)를 실시하기 전부터 비공식적으로 광주·대구·경북 등의 지역 시·군·구청에서 MSPP 장비를 공급해 와 상실감은 더욱 컸다. 장비 공급 당시 A사측에서도 “지난 2002년 9월부터 1년여에 걸쳐 성능 검사를 마쳤기 때문에 장비에는 이상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이 회사는 막다른 골목에서 M&A 등 회생을 위한 마지막 승부수를 찾고 있다.
반도체 설계업체인 휴커넥스(대표 이기주)는 지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총 70억원을 들여 정보통신부 선도기반기술 개발 사업을 진행하면서 ‘초고속 정보통신망을 위한 DMT VDSL 모뎀 칩세트’ 개발에 성공했다. 휴커넥스는 LG전자 등 8개 장비 업체와 지난해 11월 시스템 개발을 마치고 통신회사들의 사전 시험을 거쳤다. 하지만 칩 공급에는 결국 실패했다. 기존 장비와 호환이 안된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다. 그러나 기존에 공급된 외산 칩들 간에도 호환이 안되기는 마찬가지다.
이 회사의 칩세트는 지난 7월 중국의 VDSL 표준 적합성 시험을 통과, 중국 신식산업부 정보통신연구소의 성능 인증까지 받은 제품이다. 중국 표준 적합성 시험 통과 업체는 휴커넥스가 처음이다. 휴커넥스는 성능 인증을 계기로 현재 대규모 중국 수출을 추진중이다.
◇왜 외산을 쓰나=국내 통신사업자들이 벤치마크테스트(BMT)에서는 성능이 우수하다 하더라도 시장에서 검증되지 않았다거나 기존 장비와 호환되지 않는다는 점을 내세워 국산장비 도입을 꺼린다. 국산 제품을 도입, 문제가 생길 경우 도입 책임자가 책임을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국산 외면 현상을 당장 개선하기 힘든 상황임을 짐작케 한다.
업계 관계자들은 KT 민영화 이전만 해도 정부조달물품 구매 규정에 따라 국내 기업들의 제품 공급 기회가 있었다고 말한다. 최소한의 국내 기업 육성책이 마련돼 있던 셈이다. 하지만 KT가 민영화된 현 상황에서 정부가 직접 나설 수도 없는 상황이다. 자칫 통상 문제 등이 불거질 수 있다. 결국 문제는 대형 통신서비스사업자 내부에서 풀어야 한다.
◇대안은 없나=휴커넥스 관계자는 “외국의 경우 대기업 대부분이 산업 육성 차원에서 자국 제품을 우선 구매하는 게 암묵적인 관행으로 정착돼 있다”며 “국내 통신서비스회사들에 국내 산업 육성이라는 대승적인 결단이 가장 시급하다”고 말한다. 이 같은 결단이 이뤄진다면 다른 부수적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정부도 통상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선에서 국내 기업 육성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개발만 지원할 것이 아니라, 육성에도 도움을 줘야 한다는 게 벤처기업들의 설명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대규모 물량 구매는 바라지도 않는다”면서 “국내 통신회사들이 ‘레퍼런스’를 만드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장비만 공급해 줘도 해외 시장 진출이 한결 수월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통신사업자들이 성능이 우수하고 가격이 저렴함에도 불구하고 국산을 외면하는 것은 국산제품에 대한 불신과 ‘보신’ 차원의 관행 때문”이라며 “이러한 인식이 개선되지 않는 한 ‘백약이 무효’”라고 말했다.
홍기범기자@전자신문, kbh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