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게임만을 전문적으로 방영하는 방송사가 세 개나 된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이다. 게임방송의 시초인 온게임넷인을 만드는데 직접적인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현업에서 뛰고 있는 황형준 온게임넷 총괄국장은 게임방송의 산역사라고 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인생에 있어서 세번의 기회가 온다고 한다. 그 기회를 잘 잡으면 성공 하지만 놓치면 훗날 크게 후회하게 된다. 황형준 국장에게도 이런 기회가 찾아온 것은 그가 큰 시련을 겪고 있을 때 였다.
98년 애니메이션 채널 투니버스에서 기획 업무를 담당하던 시절이었다. IMF의 여파로 몸담고 있던 사업팀이 없어지면서 황국장은 선배와 몰래 게임을 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98년 당시에는 프랑스 월드컵이 열린 해였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던 축구 시뮬레이션 게임인 ‘피파 월드컵 98’이 출시된 상태였다. 황 국장과 선배는 월드컵의 대진표대로 팀을 선택해 일 대 일 대결을 벌이곤 했다.
# 게임을 중계한다는 기발한 아이디어
“게임을 하다 보니 게임이 생각보다 정교하다는 데 감탄했어요. 그래서 실제로 캐스터와 해설자를 꾸려서 중계를 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만든 프로그램이 ‘예측! 98 사이버 프랑스월드컵’이었습니다. 실제 월드컵 경기의 대진표에 맞춰서 총 16경기를 가상으로 중계방송했는데 의외로 반응들이 좋았습니다.”
게임 중계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황 국장은 ‘실제로 게임을 중계 방송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그는 당시 인기를 끌던 ‘스타크래프트’가 대회도 가능하고 중계도 가능한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99년 3월, 대한민국 최초의 게임캐스터와 해설자가 되버린 정일훈, 엄재경씨를 영입해 중계진을 꾸리고 ‘스타크래프트’ 첫 방송을 내보냈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상상이상’이었고 여기에 고무된 방송사측은 2000년 7월 게임 중계를 기반으로 세계 최초의 게임방송국인 온게임넷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이 게임방송을 만들어 가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지금은 상황이 180도로 달라졌지만 초기만해도 후원사 잡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2000년 초 스타리그를 준비할 때의 일입니다. 당시 IMF의 여파로 회사의 지원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 직접 서른 군데가 넘는 기업들을 찾아다녔죠. 그런데 기업에서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 40~ 50대다 보니 후원은 고사하고 게임중계를 이해시키기조차 힘들었어요. 방송 일주일 전까지도 후원사를 못 구했습니다. 애타는 심정으로 마지막이란 생각을 하고 하나로통신의 담당 상무에게 일주일간 매달렸습니다.”
당시 하나로통신의 상무는 60대였고 사실 ‘스타크래프트’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었지만 젊은 친구의 열정에 감동했는지 결국 방송 4일 전에 후원을 결정해 주었다고 한다. 당시 황국장은 하늘이라도 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지금은 많은 기업에서 게임 대회를 후원하겠다고 문의가 들어 오는 것을 생각하면 e스포츠의 달라진 위상을 느끼게 해 주는 일화다.
# 광안리의 기적, 10만명 운집하다
올해로 게임방송 6년을 맞고 있는 황국장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한가지 소개해 달라고 했다. 아마도 과거 어려웠던 일들을 이야기 하리라 생각했었는데 그는 지난 7월 부산 광안리에서 열린 ‘스카이 프로리그 2004’ 1라운드 결승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어려웠던 시절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당당히 보여준 감동적이었던 무대가 가장 인상에 남았던 모양이다. 황국장은 “그 때 모인 10만 관객을 생각하면 지금도 감회가 새롭다”며 “그 때 까지만 해도 온게임넷의 간판 프로그램은 스타크래프트 개인전인 ‘스타리그’였는데 스타리그는 이미 임요환, 홍진호 등 많은 프로게이머들이 연예인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리고 있어 흥행이 어느 정도 보장이 됐지만 단체전인 프로리그의 경우 스타리그에 비해 짧은 역사로 인해 흥행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황 국장은 게임 대회가 진정한 e스포츠 반열에 오르려면 팀간 경쟁체제가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프로리그 1라운드 결승전 장소를 다소 파격적으로 광안리 해변으로 잡았다. 여름이라 어느 정도 사람이 모일 것으로 예상은 했지만 10만 관객이 모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것인다.
이날의 경기는 박빙의 승부라 시간이 꽤 길어졌는데 밤 12시가 넘는 시간까지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 e스포츠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소위 ‘대세’라는 사실을 확인한 자리였던 것이다.
황국장은 온게임넷이 프로게이머와 e스포츠팬, 게임과 게임유저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e스포츠 측면에서는 프로게이머가 최고의 경기를 펼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고 팬들이 마음껏 경기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방송사가 해야할 일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에 출시된 게임이나 신작 게임에 대한 정보를 재미있고 알차게 가공해 게임유저에게 알려주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온게임넷을 우리나라 게임 산업의 대표 미디어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게임방송을 시작한 지 이제 6년이 되어갑니다. 나 없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버린지 꽤 되었죠. 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 지금의 자리에 있는 것이고 내 역할을 대신할 그 누군가가 있다면 30대에 다시 한번 힘겹지만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방송장르를 개척해보고 싶습니다.”
성공한 방송인으로 정상에 서 있지만 아직 젊은 그는 다시 한번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려는 열정만은 뜨거웠다.
1996년 고려대 서어서문학과 졸업
1996년 투니버스 입사
1999년 ‘스타크래프트’ 중계방송 개시
2000년 온게임넷 제작팀장
2002년 - 현재 영상물등급위원회 본위원
2003년 온게임넷 총괄국장
<취재부장 be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