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봉의 영화사냥]클린

장만옥에게는 어떤 행복으로도 뺏을 수 없는 슬픔이 잠복해 있다. 40대의 여배우가 여전히 관객들의 관심 한 복판에 있을 수 있으려면 단순히 빼어난 외모 이상의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녀의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작 ‘완령옥’을 보면 왜 우리의 머리 속에서 장만옥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지 이유를 알 수 있다.

1920년대 중국의 전설적인 여배우 완령옥의 일대기를 영화화 한 그 작품에서 장만옥은 자신의 불행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끝까지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한 인간의 비애를 폭풍처럼 표현한다. 세포 속으로 서서히 침투해 들어와서 어느새 목까지 가득 차오른 장마비처럼 그녀의 연기는 우리의 영혼을 포로로 붙잡는다.

그러므로 프랑스 감독인 올리비에 아싸야스가 장만옥을 위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서구인들이 상투적으로 생각하는 동양여인의 신비한 이미지가 아니라 실존적 고뇌를 가진 한 인간으로서 그녀에게 접근하겠다고 방향을 잡은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관금붕 감독의 1992년작 ‘완령옥’보다 훨씬 나이 들었지만 장만옥은 왕가위와 작업한 ‘화양연화’의 매혹적인 수리첸을 지나 록 가수의 아내 에밀리로서 마약 중독자에서 벗어나 갱생의 삶을 살려는, 그리고 시부모가 기르고 있는 어린 아들과 다시 재회하려는 소박한 꿈을 가진 여인의 모습을 가슴 저리게 표현한다.

‘클린’에서 장만옥이 맡은 에밀리는 80년대에는 잘 나가는 록 가수였지만 지금은 출연 섭외도 거의 들어오지 않는 리의 아내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기 위해 마약을 한다. 캐나다 투어 도중 모텔에서 격렬하게 부부싸움을 하고 뛰쳐나온 에밀리가 호수가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시 모텔로 되돌아갔을 때 발견한 것은 마약 과다복용으로 숨진 남편 리의 시신이었다.

‘클린’의 도입부는 이렇게 비극으로 시작한다. 핸드헬드 카메라는 불안한 에밀리의 삶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마약 소지죄로 6개월 동안 복역하고 풀려난 에밀리는 그러나 시부모가 돌봐주고 있던 자신의 아들을 만날 수 없다. 시부모들은 자신의 아들이 죽은 이유가 에밀리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제 거친 세상에 혼자 남은 에밀리. 그녀는 마약을 끊고 레스토랑 종업원으로 밑바닥까지 떨어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지만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클린’은 장만옥을 위한 영화답게 카메라는 잠시도 장만옥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삶의 나락까지 떨어져서 고달픈 삶을 살아가면서 마약을 끊고 사랑하는 아들과 다시 만날 꿈을 갖고 있으며 다시 노래로 재기할 기회를 기다리는 에밀리의 삶이 아프게 표현됐다. 캐나다와 영국, 프랑스를 이동하는 작품의 배경처럼 장만옥이 사용하는 언어도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 다양하다.

1996년 ‘이마베프’라는 영화를 찍으면서 만난 올리비에 아싸야스 감독과 장만옥은 98년 결혼했다가 2002년 이혼했지만 이혼 뒤에도 전 남편인 올리비에는 장만옥을 주인공으로 한 ‘클린’을 만들어 그녀가 칸느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게 함으로써 변함없는 우정을 보여줬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고 아무도 없다면 길은 하나 밖에 없다.’

에멜리가 처한 절박한 상황을 잘 표현한 이 대사는 구원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에밀 리가 결국 비극적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실날 같은 희망의 출구를 찾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영화 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 s2jazz@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