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고 지다 끝내 이긴 숨막히는 결전이었다. “나만의 전략으로 요환 형을 이겨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요환 형이 약하다거나 끝났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을 키워준 스승을 실력으로 압도한 제자의 심정이었을까. 우승 직후 내내 그늘진 표정으로 일관한 최연성. 실제 그의 목표는 우승이 아니었다. 넘을 수 없는 벽처럼 여겼던 임요환을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한번 꺾어보는 것이었다.지난 20일 대전 엑스포과학공원에서 열린 EVER스타리그 결승전에서 최연성은 자신을 키워준 황제 임요환을 누르고 ‘스타크래프트’ 게임리그에 최연성 시대를 열었다. 결승 직전 선수대기실에서 “누가 이기든 5판3선승제의 막판까지 갈 것 같다”는 그의 말처럼 쉽지 않은 승부였다. 마치 예견된 시나리오가 펼쳐지듯 5번의 대전은 이기고 지고, 다시 이기고 지고, 마지막에 명암이 엇갈린 혈전 그 자체였다.
경기 직 후 그는 “단 한차례 경기도 나름대로 준비해 온 빌드를 제대로 적용해보지 못했다. 그때 그때 상황에 맞춰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무아지경에 빠져 게임을 하다 나온 기분”이라는 말로 다섯 경기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특히 자신만만했던 초반 수비를 한순간에 무너뜨린 제 4경기 임요환의 초반 벙커 러시를 두고 “처음 당해본 정말 당황스런 전략이었다”고 말했다.
그랬다. 황제와 괴물이 사제지간으로 알려진 것처럼 둘 다 서로의 전략을 너무나 잘 알고 결전에 들어갔다. 최연성은 “요환 형이 어떻게든 초반에 승부를 내려 할 것”이라며 이에 대한 준비를 해왔다. 임요환 역시 ‘시간을 오래끌면 끌수록 최연성의 트레이드 마크인 물량공세를 당할 것’이라 짐작했다. 게임 해설가, SK텔레콤 T1의 동료 선수들, 타 구단 감독까지 모두 초반 전략에서 승부가 갈리면 임요환 우승, 중장기전으로 몰아가면 최연성 필승이라 입을 모았다. 이번 결승전은 이러한 예상에서 한발도 벗어나지 않았다.프로게이머가 되기 전 최연성은 툭하면 아버지에게 대들고 사고만 치던 말썽꾸러기였다. 지금은 중요한 경기 때마다 부모님이 찾아와 응원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게임하는 것을 유독 못마땅해 하셨어요. 혼나기도 많이 혼났고 때로는 마구 대들기도 했죠. 지금은 가장 큰 조력자로 대회 때마다 와주시는데 볼 때마다 이상하게 다른 감정이 생겨나네요.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습니다.” 지난 8월 MBC게임 스타리그 3연패 직후 그는 자신의 반항아 시절과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이때 “온게임넷 스타리그에서 우승해 양대 리그를 통 털어 명실공히 최고의 프로게이머라는 소릴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한 이 약속을 지켰다.
최연성은 본 모습은 외부에 비춰진 것과 상당히 다르다. 물량 전으로 한방에 몰아치는 화끈한 플레이 스타일, 185Cm의 훤칠한 키에 꽉 다문 입과 작고 매서운 눈매 등 방송 화면에 클로즈업된 그의 모습은 패기와 열정, 자신감으로 넘쳐나는 특A급 프로게이머 그대로다.
하지만 프로게이머가 아닌 20대 청년 최연성의 속은 다르다. “(상금으로) 집을 사고 싶어요. 나만의 독립된 공간을 마련한 후 차근차근 하나씩 이 공간을 키워 가고 싶어요. 어렸을 때 가난했거든요. 갖고 싶은 것 많았지만 참아야 했죠.” 우승 때마다 밝힌 그의 내집마련의 꿈. 이번 상금 역시 내 집 마련에 보탤 것이 틀림없다.
특히 그는 무척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다. 언뜻 ‘치터나 괴물 테란’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키보드가 조금만 비뚤어져도, 마우스 패드의 긁는 느낌이 약간만 달라도, 모니터의 각도가 살짝 틀어져 있어도 게임에 집중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번 임요환과의 결승 만남은 그에게 표현하지 못할 만큼 큰 부담이었다. 자신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경기를 앞두고 그의 얼굴에는 긴장과 함께 부담스러움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경기가 끝난 후 털어 놓은 얘기지만 “요환 형이 지면 어떤 표정일까, 기분은 어떨까, 결승전에서 졌다고 요환 형이 다시 약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이것이 괴물테란 최연성의 내면이다.못마땅해 하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기는 그를 더욱 게임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특별한 계획도 없이 그냥 무작정 게임만 했던 시절이다. 이때 그의 인생에 한줄기 빛처럼 다가온 것이 임요환과의 만남이다.
물론 그 만남은 일반 사회가 아닌 ‘스타크래프트’ 강호의 세계 배틀넷에서였다. “요환 형과 배틀넷에서 게임을 하게 됐죠. 몇 번 싸워보더니 한번은 프로게이머가 돼보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요. 이게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최초로 스타리그를 2번씩이나 제패하며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임요환은 한 인터뷰에서 “조만간 스타리그를 깜짝 놀라게 할 엄청난 신예가 등장할 것”이라는 말로 최연성의 존재와 등장을 암시하기도 했다.
SK텔레콤 T1의 전신인 4U 시절부터 최연성과 임요환은 사제관계로, 또는 가장 절친한 선후배 사이로 어떤 프로게이머보다 돈독한 신뢰와 친분을 쌓았다. 지금도 최연성이 가장 믿고 따르는 프로게이머는 임요환이고 반대로 임요환이 가장 아끼는 선수는 최연성이다.
그간 괴물테란이 보여준 각종 새롭고 무지막지한 전략 전술은 대부분 임요환의 조언으로부터 시작됐다. 최연성은 과거 MSL 3연패의 공을 모두 임요환에게 돌렸다. 급기야 둘의 관계는 테란의 황제와 그 황제가 키운 괴물로 비유되기까지 한다.
한편으로 놀라운 것은 공식적으로 둘이 맞붙어본 경기가 없다는 점이다. 아이러니컬하게 둘은 현 시점에서 각자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놓고 처음으로 맞붙게 됐다. 임요환은 온게임넷 스타리그 3번째 우승을 통해 황제의 부활을 꿈꿨고, 최연성은 양대리그 통합 우승으로 차세대 최고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기회였다. 그 결말은 괴물이 자신을 길러준 황제를 잡고 강호를 평정한 것으로 끝났다.
최연성의 목표는 우승 이상의 것이었다. 대회 우승은 언제라도 할 수 있지만 결승에서 황제를 꺾어 볼 기회란 쉽게 오지 않기 때문이다. “요환 형이 게임에서 스승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승부는 승부죠. 궁금한 것 있을 때마다 귀찮을 정도로 달라붙어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정말 내 스스로의 힘으로 전략적인 면에서 이겨보고 싶었습니다.”
스타리그에 영원한 1인자는 없다. 최고의 자리는 항상 새로운 도전자에 의해 바뀌는 것이 진리다. 스승과 제자였던 관계는 영원할지 몰라도 최고의 자리에 스승과 제자가 동시에 앉을 수는 없다. 지금 스타리그는 최연성이 1인자이고 최연성 시대다.
<임동식기자 임동식기자@전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