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정광춘 잉크테크 사장(1)

“펑” 소리와 함께 눈앞이 깜깜해졌다. 얼굴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왔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박사 과정 시절,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실험에 열중하던 중에 갑작스럽게 일어난 폭발 사고였다. 이때 폭발한 유리 플라스크 파편은 얼굴과 상반신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지금도 문득 팔뚝 등에 남은 흉터를 볼 때면 밤낮없이 실험과 연구에만 몰두하던 젊은 시절이 생생한 기억으로 떠오른다.

나는 화학과 발명을 좋아하는 영원한 연구원이다. 대학 시절부터 발명에 심취했다가 고분자화학의 무궁무진한 묘미에 빠져 박사 과정까지 화학을 전공했고, 지금도 이 분야에 몸 담고 있어 이미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화학과 함께 한 셈이다. 원래 성격이 어떤 일이던 시작하면 결말이 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이라서 반평생을 한 분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응용 분야가 무궁무진한 화학은 아직도 다양한 기술·사업 면에서 호기심 많은 도전자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화학연구소 연구원과 대룡 기술부장을 거쳐 지난 85년 해은 화학연구소라는 개인 연구소를 설립했다. 개인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다는 게 무척 좋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연구개발 용역의 한계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에는 개발자의 노고에 비해 연구 성과와 그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연구 성과를 제대로 평가받고 또 기술을 심도있게 활용하려면 연구 결과를 갖고 직접 사업에 뛰어들 수 밖 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난 92년 잉크테크를 설립은 이런 연구개발의 한계를 극복해 내겠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올해로 설립 설립 12년째를 맞는 잉크테크는 세계 120여개 국에 대체잉크를 수출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런 사업 성과는 쓰디쓴 실패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80년대 후반에 개발한 타자 수정액(제품명 자수정) 실패가 그것이다. 당시 사무용 소모품이었던 타자 수정액은 필수품이었지만 전량 수입에 의존했다. 자체 개발한 타자 수정액 ‘자수정’은 가격, 품질 면에서 충분히 경쟁력을 갖춘 제품이었다. 제품 출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형 유통업체에서 주문자 상표 부착(OEM) 방식으로 사업 제의가 들어왔다. 다만 ‘자수정’의 용기 디자인을 외국 제품처럼 바꾸고 한글도 모두 영문으로 바꾸자는 브랜드 변경을 전제 조건으로 달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개발과 생산’ 중심의 사고로 무장한 연구원이었을 뿐 경영자의 마인드를 갖추지 못했다. ‘품질이 우수하면 물건은 팔리게 마련’이라는 믿음 아래 브랜드 변경 제안을 과감히 거절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내 판단이 틀렸다는 것이 1억 원의 빚과 사업 정리라는 뼈아픈 결과로 여지없이 증명되었다. 주요 소비자인 여직원의 구매 성향과 당시 외국 제품 선호도가 매우 높았다는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자수정의 실패는 제품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시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

비록 값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 나는 연구자에서 경영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기업 경영과 상품 마케팅의 중요성을 깨닫고 동시에 시장 현상과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체질을 익혔다. 이를 교훈 삼아 잉크테크를 설립할 때에는 미리 유통업체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 후 시제품으로 시장 반응을 살폈다. 제품 공급 판로를 미리 확보한 다음에 공장 입지를 결정한 것도 모두 이 같은 실패 경험 때문이다. 되돌아 보면, 자수정의 실패가 결과적으로 잉크테크의 성공 기반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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