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게 우리나라와 북미에서 빛을 보지 못하지만 유독 일본에서는 한 작품이 발매될 때마다 게임숍 앞에 유저들이 게임을 구하기 위해 장사진을 치고 밤을 새는 진풍경을 만들어내는 작품이 있다.
타이틀마다 매번 밀리언셀러를 달성하며 절정의 인기를 누리는 게임, 바로 ‘드래곤 퀘스트(이하 DQ)’시리즈다.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고 팬 층도 얇은 타이틀이지만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와 함께 일본 최고의 롤플레잉 게임으로 군림하고 있는, ‘일본에서만 먹히는’ 특별한 작품이다. 다른 게임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함’은 이 작품의 아버지 호리이 유지와 작품의 독특한 성향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DQ’가 처음 출시된 시기는 게임기에서 오직 액션 게임이 전부였던 때였고, 게임기에서 사용됐던 CD 용량 5천분의 1 수준의 롬은 결코 롤플레잉 게임을 만들 수 없다고 인식됐었다.
그때 등장한 것이 바로 ‘DQ’다. 흔히 자유도라 부르는 수 많은 스토리의 나뭇가지를 잘라내고 인기 만화가를 기용해(드래곤볼의 도리야마 아키라라면 당시 최고의 만화가 중 하나였다) 게임의 이미지를 확립했다.
스토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신선했으며 멋들어진(지금 보면 권선징악의 뻔한 이야기로 보이겠지만) 호리이 유지의 스토리는 하나의 혁명적 시도였다. 이 게임은 발매 즉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고 패미컴의 황금기 속에서 150만장이라는 판매고를 올리며 눈부신 기록을 남겼다.‘DQ’를 만든 개발자는 여러 명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호리이 유지를 손꼽는 이유는 그가 가진 특별한 이력 때문이다. ‘DQ’의 탄생은 다른 게임과 색달랐고 처음에는 이름도 없는 작품이었다. 호리이 유지는 게임 개발을 철저히 유저의 손에 맡기며 시작했다.
잡지를 통해 유저들에게 어떤 게임을 만들었으면 좋을지 설문조사를 벌였고 그 의견들을 종합해 게임의 기본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계속 다듬어 만들어 낸 작품이 바로 ‘DQ’다. 그래서 디렉터도 아니고 프로듀서도 아니었던 그가 ‘DQ’의 아버지로 불리워지는 이유다. 어쨌든 이런 재미있는 이력을 통해 최초의 일본식 롤플레잉 게임이 탄생한 것이다.호리이 유지는 뛰어난 어드벤처 게임 ‘포트피아 연속 살인사건’을 만들었던 인물이다. 그러던 그가 미국에서 개발된 롤플레잉 게임 ‘위저드리’와 ‘울티마’를 접하면서 강한 자극을 받아 스토리가 중심이 되는 어드벤처를 바탕으로 일본 최초의 롤플레잉 게임을 창조한 것이다.
따라서 미국식 롤플레잉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도를 과감히 없애버리고 뛰어난 스토리를 가진 롤플레잉이 일본에서 번성하기 시작했던 이유는, 호리이 유지가 어드벤처 게임을 만들었던 개발자였기 때문이라는 이론은 설득력이 높다.
이와 같은 스토리 중심의 롤플레잉은 바로 ‘파이날 판타지’로 이어진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애니메이션 각본가 테라다 켄지에게 ‘게임으로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게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는 4편을 기점으로 완벽히 드라마에 주안을 둔 제작법을 채택해 스토리 주도의 ‘일본식 롤플레잉’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지금의 일본식 롤플레잉은 바로 이 두 작품을 통해 키워지고 일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토리와 더불어 ‘DQ’가 일궈낸 또 하나의 위대한 유산은 바로 ‘재미있는 전투’다. 하나 하나의 적을 무찔러가며 자신이 성장한다는 그 느낌. 점점 강해지면서 레벨이 오르면 마치 선을 그은 것처럼 행동 범위가 넓어지는 절묘한 전투의 재미와 완성도는 현대의 게임에 비해서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오히려 최근 게임들보다 절묘한 밸런스를 보여주었다). ‘DQ’시리즈의 마지막 특징은 철저한 감정이입이다. ‘롤플레잉(역할을 즐긴다)’이라는 장르명이 말하는 것처럼 이 장르에서 감정이입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초기의 ‘DQ’에서 이 감정이입은 게임 그 자체였다.
시리즈를 거듭해도 절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주인공, 다양한 특성을 가진 동료와의 파티 플레이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해 ‘동료애’를 물씬 느끼게 해주는 요소들. 그래픽을 단순화시켜 그런 장면들을 상상할 수 있도록 상상력을 자극한 점은 대단히 큰 매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점점 발전하는 게임기의 성능과 그 성능을 통해 점점 더 드라마틱한 모습, 더욱 더 멋진 그래픽과 음성으로 무장한 경쟁작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경향은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발매된 ‘DQ 7’에서 극에 달했고 이 작품의 특성을 이전부터 알고 있지 않았던 유저들은 ‘파이널 판타지’를 선택했다. 따라서 이 타이틀의 독특한 특징을 잘 이해하고 있는 일본 유저만 선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오묘한 인생의 운명처럼 일본식 롤플레잉의 기초를 닦았던 두 작품의 개발사가 ‘스퀘어에닉스’로 합병된 것.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최근 발매된 ‘DQ 8’는 두 시리즈의 재미있는 믹싱을 보여준다.
기존 ‘DQ’의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으면서 앞에서 언급한 몇 가지 호불호로 나뉘는 약점들을 보완하고 있다. 덕분에 기존 ‘DQ’ 시리즈에 거부감을 느꼈던 유저들도 적극 환영하며 400만장 이상의 판매량을 나타내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식 롤플레잉 게임은 ‘DQ’ 시리즈 내에서 태어나고 자라 진화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변신을 시도 중이다. 어쩌면 이 변화하는 모습도 MMORPG로 게임을 시작한 최근의 국내 유저에게는 거북한 맛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내고 수 많은 작품에 영향을 끼친 힘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힘에는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있는 진실된 매력이 있는 불멸의 게임이다.
<이광섭 월간플레이스테이션 기자 dio@gamerz.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