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규어 마니아의 세계는 깊고도 넓다. 일명 가챠폰이라고 하는 2000원 짜리 자동 판매기의 완성품만 모으는 수집가, 피규어 원형만 제작하는 제작자, 원형을 가지고 색을 칠하고 조립하는 마스터, 완구점에서 판매하는 프라모델 콜렉터 등등. 프라모델 콜렉터도 전투기만 모으는 사람, 탱크만 조립하거나 각종 군인만 좋아하는 유저 등 각양각색이다. 여기에 관절이 움직이는 액션 피규어의 세계는 또 다른 분야로 간주된다.
이 중에서 ‘마스터 B’로 널리 알려진 배상철(28세)씨는 완성된 원형에 색을 칠하는 분야에서 최고로 유명한 마니아 중의 마니아다. 그의 작업실은 각종 물감과 장비로 가득하며 한쪽 벽을 장식한 피규어들은 다양한 포즈와 표정으로 손님을 반긴다. 기자와 만난 그의 첫 마디는 “저보다 훨씬 잘 하고 유명하신 분들이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텐데 마치 제가 최고처럼 오해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번도 얼굴을 노출하지 않고 예명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다고 덧붙였다.
#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프라모델을 구입해 열심히 만들었던 ‘보통 남자애’였다. 로보트를 좋아하고 조립식의 탱크와 장갑차 부품을 이리저리 붙이며 깊은 재미를 느꼈다. 대부분의 ‘남자애’들이 중학생이 되면 프라모델에서 벗어나 다른 차원의 취미 생활을 즐기지만 마스터 B는 이를 그만 둘 수 없었고 친구들이 밖에서 땀을 흘리며 뛰어 노는 동안 그는 방에서 칼과 니퍼, 본드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창조해 나갔다.
대학도 자신의 취미와 연관된 미대로 들어가 조형과 색깔에 대한 감각을 더욱 키웠다. 미대에서 그가 가장 관심을 두었던 것은 바로 조색과 색감이었다. 대학생이 되면서 그의 취미는 프라모델에서 피규어로 옮겨졌고 피규어는 대부분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캐릭터다.
따라서 원작과 완전히 같은 모습과 색을 지닌 피규어를 위해서는 원하는 색깔을 만들 수 있는 조색 능력이 필요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세련된 색을 추가해야만 했다. 미대를 다니면서 익힌 조색 분야에서 만족을 느낀 그는 자신이 만든 피규어들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인터넷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전국의 피규어 마니아들은 그의 작품에 찬사를 보냈고 일부 유저들은 색을 대신 칠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 전국에서 청탁 쇄도
“처음에는 물감 비용만 받고 제작해줬습니다. 원형을 완성하고 색을 칠하는 작업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3일 이상이 걸립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피규어를 완성해 보내줬어요. 그런데 청탁이 계속해서 늘어 나더라고요.”
그의 실력이 전국으로 알려지면서 색을 칠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일부 유저들은 일본에서 공수한 원형 부품을 마스터 B에게 몽땅 맡기고 조립과 색까지 모두 완성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작년 8월부터 그는 다음 카페(http:cafe.daum.netresinmania2)를 개설해 취미도 즐기고 아르바이트로 돈도 벌겸해서 대리 제작을 시작했다.
“일본에는 피규어 원형을 팝니다. 우리 나라 돈으로 약 20만원 정도 하는데 이것으로 조립하고 색칠을 해야 하는 것이죠. 조립은 크게 어려운 점이 없는데 아무래도 색을 입히기 위해서는 많은 도구와 색에 대한 감각이 없으면 힘들잖아요. 그래서 저 같은 사람한테 부탁을 하는 겁니다.”
마스터 비처럼 피규어의 색만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사람은 국내에 극히 드물고, 이 분야에서 이처럼 정밀하고 완벽한 색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가 거의 유일했기 때문에 유명해지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최근에 그가 완성한 작품은 ‘투 하츠’의 쿠르스가와 아야가, ‘오 나의 여신님’의 베르난디, ‘에반겔리온’의 레이나 아스카, 스쿨드 등이다. 그런데 그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 원형에 흥미 발동
“색을 칠하는 일은 이제 그만 할까 합니다. 저는 이런 것보다는 피규어 원형을 직접 만들어 보고 싶어요. 원형이란 피규어의 몸통을 수작업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프레스로 찍어 내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일일이 깍아 만들기 때문에 더욱 가치가 높고 힘든 작업이죠. 여기에 흥미가 자꾸 강하게 생기네요. 하하하.”
매달 일본에서 피규어 전문잡지를 정기 구독하며 감각을 놓치지 않는 그는 이 분야에서 가장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며 “피규어에는 여성 캐릭터가 많은데 괜히 변태 취급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마지막 멘트를 남기며 싱긋 웃었다.
<김성진기자 김성진기자@전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