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34) CCR 원화파트팀장. 그는 한때 잘 나가던 만화가였다.
대표작 ‘레드블러드’는 지난 94년부터 무려 7년동안 만화잡지 ‘영챔프’에 연재됐고, 단행본으로도 30만부나 팔렸다. 제1차 우주전쟁과 지구인들의 생존게임을 멋지게 구현해 한국 만화계를 대표하는 팬터지 전쟁서사극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요즘 만화가 아니라 게임 원화 작가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올 최대 흥행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RF온라인’도 그의 손을 거쳤다. 한때 게이머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섹시한 ‘코라’ 캐릭터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다음달 업데이트될 ‘RF온라인’ 몬스터 일러스트 작업에 한창인 그는 “게임이 매력적인 것은 만화보다 훨씬 대중적인 매체이기 때문”이라며 “열심히 공부해 세계적인 게임 일러스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 게임 원화작가로 ‘제2의 인생’
김씨가 게임업체 CCR에 입사한 것은 2002년 11월. 미국 만화를 좋아했던 그는 평소 미국시장에 진출하는 꿈을 꿔왔고 ‘레드블러드’ 연재 종료와 함께 그 기회를 잡는 듯했다. 당시 한 회사가 국내 유명 작가 여러명을 모아 미국 만화계에 진출하도록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그 역시 역량을 미국 진출에 집중했다. 미국 단행본 형식의 SF만화 ‘Espeionage’(전 3권) ‘Scalate FOX’(전 2권)를 그려 놓았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가 갑자기 무산되면서 그의 인생 진로가 바뀌었다. 연재에 컴백해달라는 만화계의 러브콜이 줄을 이었지만 그는 게임회사 입사라는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당시 재능있는 만화가들이 게임쪽으로 진로를 바꾸는 분위기도 한몫했지만 ‘뉴 미디어’에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매체만 바뀔 뿐이지 어차피 그림 그리는 일은 똑같다고 생각했어요. 게임은 훨씬 많은 독자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었죠. 일본의 경우에는 ‘스트리트파이터’가 출시된 이후 만화보다 게임 쪽에서 앞서가는 작가가 훨씬 많아졌잖아요.”
한 때 세계사 선생님을 꿈꿨던 그는 고등학교때 친구를 잘 못 만나(?) 만화가가 됐다고 회상했다. ‘열혈강호’를 그린 양재헌씨, ‘힙합’의 김수용씨, ‘라그나로크’의 이명진씨 등이 그가 고등학교 때 사귀었던 친구들이다.
“예전에 친구들끼리 단체사진을 찍은 적이 있는데, 그 속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만화가가 되었더라구요. 지금은 저처럼 게임쪽으로 눈을 돌리는 것도 그렇고요.”
# 지금은 수업중
만화가들의 게임업계 진출은 어찌보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시장이 훨씬 커진 데다 성공신화도 잇따른 여파다.
‘리니지’의 신일숙씨가 중견 작가를 대표한다면 ‘라그나로크’의 이명진씨는 젊은 작가를 대표하는 성공신화다. 최근 온라인게임으로 나온 ‘열혈강호’의 양재현 작가도 비슷한 궤적을 밟고 있다.
그러나 김씨는 우회진출보다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원작 만화의 판권을 팔거나 원작을 확대재생산하는 쪽으로 게임계에 발을 들여 놓은 반면 아예 게임회사에 취직을 했다. CCR에 취직하기전 ‘조선협객전’ ‘코룸’ 등의 게임 포스터와 일러스트를 그렸지만 ‘맛보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왕 게임 일러스트나 그래픽을 그리려면 게임 개발과정을 몸소 체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컴맹이었던 제가 이제 제법 PC도 다루니 그 생각은 정확하게 적중한 거죠. 하지만 아직 배울 것이 많아요. 저는 여전히 수업 중이에요.”
그는 평면의 출판만화와 달리 3D로 구현되는 게임 그래픽이 처음에는 낯설기까지 했다. 서버 부하를 고려해 한정된 데이터량에 맞춰 그래픽 퀄리티를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작업도 노하우가 필요했다.
“RF온라인이 나오고 난 뒤 좀 더 화려하게 최적화할수 있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많아요.”
그는 ‘RF온라인’ 이후 쏟아지고 있는 대작 게임들을 보면서 모종의 경쟁의식도 느낀다고 말했다. 처음 게임 디자인을 시작하기 전보다 점점 게임 그래픽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이같은 욕심은 더욱 생긴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꿈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미국 진출이라는 꿈은 여전히 유효하고, 자신이 그린 만화를 원작으로 한 게임도 만들고 싶다. 그리고 세계적인 게임 일러스터가 되겠다는 자기최면도 걸고 있다.
“만화가일 땐 밤낮을 거꾸로 살았어요. 사실 출퇴근 생활도 못할 줄 알았는데 되더라구요. 결심이 서면 못하는 게 없을 것 같아요.”
<장지영기자 장지영기자@전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