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정종태 이노와이어리스 사장(1)

(1) 나와 함께 한 사람들

대학을 졸업하던 지난 88년, 나와 대학시절 절친한 친구인 정진섭은 병역특례요원으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 입사했다. 함께 대학원을 다니며 나는 통신을, 정진섭은 화상처리를 전공했다. 무선통신 불모지에 가까웠던 그 시절, 우리는 앞으로 도래할 무선통신 시대를 예견이나 한 듯이 전파신호처리연구실에 지원하였고, 무선통신 개발단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때 난 운 좋게도 90년부터 92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퀄컴사와 공동으로 추진된 CDMA 이동통신 시스템 개발 사업을 위하여 미국에 파견되는 5명 중의 한 명이 되었다. 당시에 병역특례 신분으로 이 같은 행운을 잡았다는 것은 천운이나 다름없었다. 5명으로 구성된 파견단은 이동통신에 대해서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당시 디지털 이동통신기술 개발에 나서겠다며 정말 열심히 뛰었다. 오전 8시부터 밤을 새워가며 기술습득에 매달렸고, 동료들과 하나라도 더 익히려고 노력했다.

 이곳에서 훗날 나의 사업인생을 펼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인 윌리엄 손을 만나게 된다. 그는 그 당시 퀄컴의 엔지니어였다. 병역특례를 끝내고 94년 7월에 나는 제 2 이동통신 사업자로 출범한 신세기통신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곳에서 세계 최초로 CDMA 이동통신 상용서비스 개시를 준비하는 행운을 또 한 번 가지게 되었다. 97년 11월 당시 퀄컴 한국 지사장이던 윌리엄 손이 PDA 기능이 내장된 ‘스마트 폰’ 을 함께 개발해 보자는 사업 제의를 해왔다. 난 망설임 없이 한국의 생활의 정리하고, 일주일 후 미국으로 가 ‘네오포인트’를 설립했다.

네오포인트를 설립한 지 1년 8개월 만에 ‘스마트 폰’ 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10여명으로 출발한 직원은 어느덧 250명이 되어 있었고, 미국 내 통신 관련 잡지들은 이동통신시장을 이끌 차세대 제품이라는 호평을 앞다퉈 보도했다. 하지만, 너무나 시대를 앞선 개발이었을까?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현재에도 활성화 되지 않은 스마트폰이 그 당시 잘 팔릴 리가 없었다. 초기에 1만대를 판 게 전부였고 20만대가 재고로 쌓였다. 나스닥 상장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점차 난 미국 생활에 점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이때 정진섭 박사가 나를 찾아왔다. 94년 7월에 미국 유학 길에 올랐던 정진섭은 조지아텍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2000년 4월에 한국 귀국길에 우리 집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1주일 동안 두 가족은 미 서부를 유람했고, 기회가 오면 함께 사업을 할 것을 결의하게 되었다. 물론 아이템도 사업 자금도 고려하지 않은 약속이었다.

2000년 여름. 한국에서 중소기업의 연구소장으로 있던 친구에게서 좋은 사업 아이디어가 있으면 가르쳐 달라는 내용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 당시 나는 CDMA2000 시험 단말기를 만들어 미국 장비 제조업체에게 납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동통신에서 음성뿐만 아니라 데이터 서비스가 중요해 진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던 터라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사업을 이야기해 주었다. 일주일 후에 돌아 온 전화는 사업 자금은 자기가 구하도록 도와 줄 테니 한국에 와서 나보고 직접 해 보라는 것이었다.

 또 한번의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내게 찾아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사업계획서를 준비해 한국으로 왔다. 제일 먼저 정진섭박사를 만나 사업 내용을 설명 했고 사업인생을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큰 문제가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정박사가 1억 원의 유학자금을 ETRI에 갚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업을 포기하느냐 1억원의 유학자금을 갚고 사업을 진행하느냐의 갈림길에 섰다. 우리는 중소기업 연구소장으로 있던 친구의 도움으로 유학자금을 해결하고 나와 정박사가 가지고 있는 5000만원으로 2000년 9월 회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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