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부터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빛소프트의 김영만 사장이 돌연 한국e스포츠협회장 사임의 뜻을 밝혔다. 프로게임의 대부로 불리는 그의 이같은 폭탄선언은 다소 의외다.
김 회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프로게임 제 1종목인 ‘스타크래프트’를 국내에 보급했고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기업이 공식 후원하는 프로게임단인 한빛스타즈를 창단했다. 홍진호, 박정석 등 이름 석자만 대면 알만한 프로게이머들이 한빛스타즈를 거쳐 이름을 날렸다. 또 한국e스포츠협회도 만 5년간이나 이끌어왔다. 그러던 그가 내년까지 임기가 보장돼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스스로 한국e스포츠협회 회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한 것이다.
“e스포츠포럼에 참여하면서 느낀 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수와 구단 권익을 지켜줄 협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힘 있는 집행부가 꾸려져야 합니다.”
김 회장이 결단을 내린 것은 자금력과 발언권을 갖춘 대기업이 회장사를 맡도록 해 협회를 더욱 반석에 올려놓자는 복안에서였다고 설명한다.
“지난 8월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펼쳐진 스카이프로리그 1라운드 결승 때 무려 10만 관중이 운집했습니다. 프로게임이 10만 관중을 끌어들이는데 협회가 힘이 없어 번듯한 경기장 하나도 못만들어줘서야 되겠습니까?”
그에 따르면 현재 KTF나 SKT 등의 대기업에서 회장사를 맡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그는 차기 집행부가 원하는 대로 구도를 가져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새 집행부가 꾸려져야 한다는 판단에서 가능하다면 내년 1월 중에라도 출범하도록 할 생각이다.
# 프로게임 틀 만들어
“당시 프로게이머를 새로운 직업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었고 이는 노동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해 협회 일을 하는데 대해 아는 선배들은 ‘너 깡패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사실 프로게임의 틀은 김 회장이 갖춰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e스포츠협회는 99년말 21세기 프로게임협회로 출범했는데 이는 한국이라는 말을 쓸 수 없어서 였다. 지난해에 와서야 현재의 명칭을 갖게 됐다.
김 회장이 협회 운영을 위해 쏟아부은 돈만 해도 20억원 정도에 달한다. 협회는 당시 ‘스타크래프트’ 대회를 운영하던 회사 등 15개사 임원들이 모여 만들어졌는데 실질적인 활동은 대부분 김 회장의 몫이었다.
“4년간 한빛소프트 혼자서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무국장이 대기업의 참여를 위해 쫓아 다니며 ‘스타크래프트의 인기가 언제까지 지속되겠냐’는 의구심을 설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e스포츠라는 장르가 가능한 것이 아니냐’는 광범위한 정서가 형성되면서 최근들어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올해 SK텔레콤 T1, 팬텍앤큐리텔 큐리어스 등 대기업이 후원하는 구단이 속속 생겨났고 문화관광부에서도 e스포츠 로드맵을 준비하고 나섰다.
# 협회는 선수 권익 보호해야
“차기 집행부는 할 일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더욱 힘 있는 회장이 필요한 것이고요.”
김 회장는 프로게임리그가 PGA투어식으로 기업이 후원하는 리그가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협회는 권익단체이기 때문에 주체가 프로게이머가 돼야 하는데 이들은 상금수입이 적어 대부분이 소양교육비 조차도 안돼는 회비마저 제대로 못 낼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스타선수도 발굴해내야 합니다. 또 수십만명의 팬을 확보한 임요환이나 신주영 같은 선수들이 단명하도록 놓아둬서는 안 됩니다.”
그는 선수들의 수명을 늘려주기 위해서는 시니어대회도 열고 프로대회에서는 협회에 등록된 검증된 선수들끼리만 시합을 갖도록 해야 된다고 역설한다. 무명이 유명 프로게이머를 한두판 이겼다고 실력이 프로게이머보다 뛰어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군대 문제도 풀어야 할 과제인데 상무 도입 등을 추진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스가 올림픽의 종주국이듯 한국이 e스포츠의 종주국이 돼야 합니다. 이는 협회의 중장기 비전이자 개인적인 꿈이기도 합니다.”
김 회장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한국이 e스포츠의 종주국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발 빠르게 국제기구의 조직화에 나서야 한다는 점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중국이나 일본에 종주국의 자리를 선점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빛소프트가 중국, 일본, 대만 등 해외 8개국에 게임을 퍼블리싱해 많은 파트너를 확보하고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국제기구가 만들어지는 것에 힘을 보태겠다고 다짐한다.
김 회장은 샌프랜시스코에서 열린 WCG에 국가를 대표해서 출전한 선수, 감독에게 유니폼 조차 제대로 못 입혀 보내 가슴아팠었다고 한다. 중국은 게이머들을 합숙훈련시키는 등 일반 운동종목과 똑같이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 ‘죽은 게임 부활 못 한다’ 통설 깰 것
“한빛소프트에 대해 오프라인 PC시장이 위축되는 상황에서 변신에 성공하지 못했다며 주변에서 우려가 많습니다. 이는 ‘탄트라’의 실패를 보고 하는 얘기인데 ‘한번 죽었던 게임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통설을 끼뜨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 회장에 따르면 현재 ‘탄트라’의 국내 월 매출이 2억원이 나오고 있고 일본의 첫날 동접수가 5000명을 넘었으며 중국, 필리핀, 인도에서의 반응도 좋단다. 특히 ‘서바이벌프로젝트’, ‘팡야’, ‘위드’ 등 대부분의 게임이 이미 손익분기점을 넘어섰다. 또 ‘네오스팀’ 등 4개 작품을 새로 준비하고 있어 2007년까지의 라인업도 모두 끝낸 상황이다.
“미국에서도 ‘팡야’에 대한 관심이 큽니다. ‘팡야’가 e스포츠 정식 종목이돼 세계인이 즐기도록 할 것입니다.”
그는 해외 주주들과 ‘3년 내에 아시아의 넘버원 퍼블리셔가 되겠다’고 한 약속을 못 지켰는데 이제는 지킬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e스포츠협회의 수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벗어 놓는 김 회장이 어떤 모습으로 게임업계를 이끌어갈지 자못 기대된다.1988년 광운대 전자계산학과 졸업
1988~1999년 금성소프트웨어·LG-LCD 소프트웨어 사업부
1999년 한빛소프트 대표
2001년 고려대 경영대학권 최고경영과 과정 수료
2000년~현재 한국e스포츠협회 회장, 한국통신벤처기업연합회 수석부회장
2001년~현재 벤처기업협회 이사
2001년~2004 추계예술대학교 문화산업대학원 겸임교수
<황도연기자 황도연기자@전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