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를 넘어 시스템 강국으로](1부)칩 하나가 세상을 바꾼다③

◆`반도체 로드`가 뚫린다

 내륙 아시아를 횡단하는 고대 동서통상로(東西通商路) 실크로드. 기원후 1세기에 성립된 실크로드는 13세기까지 그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세계 경제 형성의 일등공신으로 역사 속에 남아 있다. 동방에서 서방으로 간 대표적 상품인 중국산 비단에서 유래한 이 길은 당시 경제뿐 아니라 문화·종교·사상 등 무형의 문물까지 전달하면서 동양과 서양이 접목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냈다.

과거 실크로드 이상의 파괴력을 지닌 ‘21세기 실크,반도체 로드’가 뚫리고 있다.

중국산 비단에 버금가는 획기적 상품인 CPU라는 물건에 전세계가 흥분했다. 앞다퉈 이 물건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고 ‘21세기 실크로드’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21세기들어 터만 닦인 이 길을 한층 탄탄하게 정비하는 물건이 세상에 나타나고 있다.CDMA,GSM,WCDMA라는 무선통신칩이 그것들이다. 세계 휴대폰업체들은 이 칩을 구하기 위해 ‘반도체 로드’에 속속 합류했다. 퀄컴과 노키아의 CDMA·GSM칩은 21세기 대표적 상품인 휴대폰을 만드는데 필수적인 물건. 이 물건 없이는 경제성장이 불가능한 상황까지 내몰릴 처지다. 이 물건을 가진 자는 그 자리에서 돈방석이 앉을수 있다. 이 보다 한발 앞선 WCDMA는 21세기 상인들의 엘도라도로 떠오르고있다.

노어플래시메모리,낸드플래시메모리라는 물건도 마찬가지다.이 물건들 또한 21세기 초 대표적 상품인 휴대폰과 MP3 등 들고다니는 전자기기를 만드는 데는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 2003년에는 이 때문에 낸드플래시메모리를 만드는 한국 삼성전자로 세계의 눈과 발이 연결되는 ‘반도체 로드’가 형성됐다. 삼성전자의 초고속 메모리를 찾아 몰려든 세계 ‘거상’들도 있었다. 당시 게임기를 생산하던 이 거상들은 고대 ‘고급 비단’격인 초고속 D램(램버스·GDDR D램)을 기술료까지 듬뿍 계산해 사들였다.

21세기 반도체 로드가 형성되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대표하는 반도체를 가진 자가 경제 주도권을 쥐게 되고, 그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교역이 세계 기술 통상로가 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시스템이 하나의 칩으로 집적되는 시스템 온 칩(SoC). 아직은 초기지만 조만간 반도체가 모든 기능을 수행하고, 세트는 껍데기에 불과하게 되는 SoC 시대가 찾아 온다. 이 시대에 돌입하게 되면 반도체는 모든 첨단제품의 핵심이 되고, 산업계에는 더 좋은 반도체를 개발하는 곳을 찾아다니는 다원화된 ‘반도체 로드’가 형성된다.

과거 금과 석유가 세계를 좌지우지했다면 21세기에는 반도체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반도체는 이미 산업의 화폐가 된 지 오래다. 이 같은 현상은 메모리 반도체분야에서 현재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인텔·퀄컴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제 시스템반도체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시스템반도체는 첨단 산업분야에서 더욱 강력하게 산업의 화폐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반도체는 환율 등과 마찬가지로 우리 산업의 지표가 되고 있다. 반도체 가격 등락에 따라 세계 산업이 울고 웃는다. 이미 세계 경제에 있어 반도체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삼성전자의 황창규 반도체총괄사장이 주장한 ‘GDP·반도체 성장 동조론’도 이를 뒷받침한다. 지금까지 반도체시장 성장률은 PC시장 성장률에 동조했으나 반도체가 컨슈머 제품에 대거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산업 전반의 생산성을 나타내는 GDP에 연동되기 시작했다는 것. 이는 반도체가 산업 전반의 필수 부품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유국’이 석유생산량을 늘리느냐 줄이느냐는 20세기에 이어 21세기인 지금에도 세계 경제의 초미 관심사다. ‘산 반도체 국’이 핵심 반도체의 생산량이 줄어드느냐, 늘어나느냐가 초미에 관심사가 될 시대도 멀지 않은 미래에 예상된다. 지난 2004년 퀄컴이 ‘통화량(CDMA생산량)’을 늘리겠다는 발표에 세계가 관심을 보인 것과 OPEC의 석유 증산 발표에 세계 경제가 움직이는 것은 사실 별반 다를 게 없는 시대에 돌입해 있다.

21세기 산업의 화폐인 반도체. 세계 기술을 흡수할 수도 세계 산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이 강력한 화폐를 만들기 위해 전세계는 ‘산 반도체 국’을 지향하며 돌진하고 있다.

◆제품 속에 숨어있던 칩 마케팅 `얼굴`로 부상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제품의 홍수 속에서 항상 어느 것을 구매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위치에 있다. 이 때문에 사업이건 장사건 더 이상 마케팅 없이는 유지가 불가능하다. 기업들은 자사 제품을 보다 더 잘 알리기 위해 회사 이미지와 제품의 기본 성능 등을 고려해 가장 좋은 이름을 짓는데 골몰하고 있다. 상거래에서는 불리는 제품의 이름이 그 회사의 마케팅력과 매출 확대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최근 제품 속에 숨어 지내던 칩들이 그 상품의 ‘얼굴’로 부상하고 있다. 효과적인 마케팅을 위해 기술력의 대명사 격인 반도체를 브랜드화해 전면에 내세우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제품에서 기술력이 차지하는 위상이 커진 것이며, 반도체가 숨어 지내던 시절을 접고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시대로 돌입한 것을 의미한다.

삼성전자는 최근 내부적으로 ‘Itzin(IT’s in, 안에 있다)’이란 브랜드 마케팅을 추진할 지 여부를 놓고 고민 중이다. 숨어 있는 부품의 기술을 효과적으로 세상 밖에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이 브랜드는 매우 상징적이다. Itzin은 ‘제품 안에 세상에 자랑할 만한 무엇이 있다’는 것을 어필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브랜드인 셈이다.

기술력을 담은 반도체가 제품의 브랜드명이 된 사례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니의 ‘베가(WEGA)’. 베가는 아날로그 TV시장을 석권하면서 기술브랜드 마케팅 수단으로 업계에 각인돼 있다. 마쓰시타의 디지털카메라 브랜드인 ‘루믹스(lumix)도 비슷한 예다. 시스템반도체인 루믹스를 브랜드로 내세워 시장에서 강한 기술 이미지를 심고 있다. 두 회사의 마케팅 경쟁이 바로 칩 브랜드화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브랜드명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삼성전자와 LG전자도 수년 전부터 핵심기능칩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는 마케팅을 시도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DNIe, LG전자의 XD엔진이 대표적이다. 화질개선칩인 이 두 칩의 이름은 세트 브랜드명과 함께 나란히 TV·신문·잡지 광고에 실리면서 명성을 쌓아 가고 있다. 삼성전자는 조만간 DNSe라는 음질개선칩도 세상 밖으로 끌어낼 예정이며, LG전자는 HD디지털방송을 HD급으로 녹화·재생하는 기능을 지원하는 헤론(Heron)칩을 새로운 마케팅 포인트로 내세우고 있다.

사실 반도체 브랜드 마케팅의 원조는 인텔이다. 인텔 인사이드에서 시작된 ‘칩 이름을 인사이드에서 아웃사이드’로 끌어내는 작업은 바로 기술력의 집적체인 반도체에 대한 예우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필립스가 ‘넥스페리아’를 기술브랜드로 내세워 통합마케팅을 시도하고 있으며 AMD도 최근 노트북 전용으로 튜리온64(Turion)를 도입해 마케팅을 강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