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PC시장의 화두는 ‘가격’이다. 100만원대 이하 노트북PC 출시를 계기로 ‘가격 파괴’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지나친 가격 경쟁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지만 상당한 인지도를 가진 브랜드 업체까지 가세해 가격 경쟁은 하나의 추세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게다가 PC제품의 성능도 점차 평준화되면서 결국 ‘가격과 서비스’가 소비자의 구매를 유도하는 지렛대가 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PC 가격의 하락은 국내뿐아니라 미국· 일본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으로 가격에 승부를 거는 델컴퓨터는 이미 800달러 이하의 PC를 선보였으며 게이트웨이(729달러), HP(699달러) 등도 가격 경쟁에 뛰어들었다. 일본에서도 고가의 브랜드로 알려진 소니 ‘바이오’가 10만9천엔, 도시바가 8만9천엔 수준의 보급형 노트북PC를 출시해 화제가 됐다.
노트북PC 가격이 떨어지는 데는 생산 원가를 낮추고 마케팅 비용을 절감한 데도 원인이 있지만 그만큼 유통 환경이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통 단계가 복잡한 국내에서는 이미 전통 방식의 유통 단계가 크게 축소되는 추세다. 제조업체-총판(직판)-대리점-소매점-소비자 등 최소 4단계 이상을 거쳐야만 했던 유통 구조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주요 PC업체는 이미 이를 감지하고 있다. 박시범 LG전자 PC사업부 상무는 “국내 소매 시장에서 유통되는 데스크톱PC와 노트북PC의 절반은 전자상가를 통해 처리되는 물량이었다”며 “하지만 최근 조사 결과 이 비중이 갈수록 축소되면서 올해 처음으로 50% 이하로 떨어져 새로운 유통 판로 대책을 준비중” 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컴퓨터=용산 전자상가’라는 등식이 점차 효력을 잃어가고 있다. 대신에 인터넷 쇼핑몰과 TV홈쇼핑 등 새로운 유통 채널이 급부상하고 있다. 할인점과 양판점 등 이전에 PC유통 채널로는 미약했던 전문점도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미 탄탄한 대리점 망을 갖추고 있는 삼보컴퓨터는 이를 활용하기보다 오히려 할인점 유통망을 적절히 이용, 저가 노트북PC를 성공적으로 론칭할 수 있었다. 삼보는 미국에서도 소비자와 접점이 높은 전문 유통점을 적극 공략해 단기간에 ‘에버라텍’의 매출을 크게 올렸다. 올해 월 매출 100억원을 돌파해 PC업계를 긴장시켰던 중견 브랜드 주연테크도 TV홈쇼핑을 적절히 활용해 성공한 케이스다. 삼성·LG·삼보컴퓨터 등에 비해 유통망이 취약했던 주연테크는 이미 오래 전부터 홈쇼핑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미지 마케팅에 나섰다. 이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면서 매출까지 이어진 것이다.
송시몬 주연테크 사장은 “합리적인 유통 전략은 이제 PC 가격을 낮추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되었다”며 “더 많은 소비자를 만나고 싶어하고 어떻게 이익을 주느냐를 고민하는 제조업체는 앞으로 제품보다는 유통망에 대한 고민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때 새로운 유통 채널로 인식됐던 인터넷도 이제는 비중 있는 유통망으로 떠올랐다. 최근에는 명확하게 구매자와 판매자가 구분되는 인터넷몰뿐 아니라 소비자와 판매자의 경계가 모호한 온라인 채널까지 등장했다. 옥션· G마켓 등과 같이 어느 누구나 제품을 올릴 수 있는 ‘오픈마켓’ 또는 ‘마켓플레이스’라고 불리는 새로운 개념의 신유통망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또 영세한 기존의 소형 PC 판매점이 하나로 통합해 시장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이제 PC는 총판과 직판을 거쳐 소비자 손으로 가야만 하고, 시장 형태는 기업과 소비자로 양분된다는 고정 관념이 깨지고 있다. 상품을 직접 보지 않고 제품 사양만을 보고 인터넷으로 믿고 구매하거나 심지어 할인점에서 ‘카트’를 빌려서 일상용품처럼 PC를 선택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강병준기자@전자신문, bj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