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1일 밤 11시50분.
그는 사무실에서 초조하게 전화 한통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벨이 울리고, 전화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1억800만달러(약 1100억원)가 입금됐습니다”였다. 007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 한국 게임업체 그라비티의 50여일전 기록이다.
한국 게임산업 10년의 결실이자, 김정률 회장 자신으로서도 또 하나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국내 기업공개(IPO)를 거치지 않고 세계 자본시장 꿈의 무대 나스닥에 직상장한 첫 게임업체일뿐 아니라, 공모자금 규모로도 사상 최대다.
그 성공 신화를 일군 김정률 회장.
그는 그 전화 한통을 받고 기쁨과 슬픔이 섞인 눈물을 남몰래 훔쳤다. 넉달전 세상을 뜬 어머니가 그 열매를 보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뒤늦은 회한 때문이었다.
나스닥에 성공적으로 상장된 것은 이 회사가 만든 온라인게임 ‘라그나로크’가 전세계 23개국에 서비스되고 있다는 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해외 매출비중이 70%대에 달하고 매년 서비스 수출국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도 성장성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근거가 됐다.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에 상장 신청서를 제출하고 135일 안에 심사가 통과돼 거래를 시작해야하는 피말리는 작업이었습니다. 모두 145개에 달하는 회계·경영 관련 질의에 답했으며, 다시 돌아온 40개항의 재질의와, 또 다시 7개, 그리고 막판 4일을 남겨두고 되돌아온 1개의 마지막 질의 등 김&장과 삼일회계법인이 그야말로 밤샘 작업으로 이뤄낸 결실입니다.”
김 회장의 기억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은 일화도 있다. SEC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스닥 현지 주식시장과 투자자들에게 헛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진원지를 찾아가 보니 이미 나스닥에 상장해 덩치가 굵어질대로 굵어진 샨다, 시나닷컴 등 중국 게임업체들이었다.
애널리스트를 동원해 ‘믿지 못할 회사’라니 ‘낭패를 볼수 있다’느니 최악의 루머를 쏟아냈던 것이다. 그도 그를 것이, 한국산 게임을 수입해 유통시킨 것으로 나스닥까지 올라간 그들이 한국 온라인게임 개발사가 직접 나스닥에 노크한다니 두려움이 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장이지만, 신념과 자존심도 걸린 문제였습니다. 중국업체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오기 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한국 게임업체가 본질적으로 중국업체에 앞서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로도 여겨졌습니다.”
나스닥 상장 이후 두가지가 바뀌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직원들의 사기다. 개발인력이 회사 전체 경쟁력의 전부이다시피한 게임개발사로서는 이들의 자긍심과 사기는 개발작의 성공과 직결될 수 밖에 없다. 이들이 가진 나스닥업체 개발자라는 인식은 그것 자체가 상품 이상의 시장가치를 갖는 일이다.
또 하나는 해외 게임업체가 그라비티를 대하는 시각이다. 예전 애걸복걸해도 미팅 일정을 잡아줄까 말까하던 해외 굴지의 업체들이 이제는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다. 일본 선도업체들로부터는 제휴 또는 공동개발, 서비스에 대한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
“자금 이상의 효과를 얻었습니다. 물론 유효 실탄이 늘어난 것은 커다란 힘이 됩니다. 하지만 직원들의 사기와 대외 인지도가 상승된 것은 그 어떤 것에도 비교할 수 없는 ‘밑천’입니다. 나스닥업체라는 자존심과 경쟁력으로 이제 다시 출발선에 선것 처럼 의욕을 갖게 됩니다.”
김정률 회장의 게임사업 2막이 올랐다.
누구나 마다하지 않을 영광의 길처럼 보이지만, 그의 걸음에는 ‘처음’에 대한 두려움이 늘 묻어있다. 그러면서도 업계 ‘큰 형님’처럼 그는 발 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청년 같은 패기와 열정으로 그는 한국의 게임역사를 쓰고 있다.
나스닥 상장으로 모든 것을 이룬 것 같은 그의 다음 행보가 뭐가 될지 궁금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진호기자@전자신문, jho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