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봉의 영화사냥]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제 1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 수상작인 김영하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다. ‘팬터지 기법을 도입, 비현실적인 방법으로 현실에 접근한 흥미 있고 비범한 소설’이라는 평가와 ‘죽음이라는 진부한 주제를 몽타주를 방불하는 절묘한 구성으로 배열한 솜씨가 충격적이다’라는 상찬을 받은 이 소설은 특히 정보화 사회로 변화해가는 시대적 감수성을 흡수하여 속도감 있는 이야기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카운슬러 S는 작가이자 자살 도우미이다. 그는 죽음을 원하는 사람들이 가장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영화 속에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은 모두 3명.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감에 사로 잡혀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북극으로 떠나기를 갈망하는 술집 여종업원 세연과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나 ‘엑스 저펜’의 히대처럼 전설적 존재들의 쿨한 죽음을 동경하는 십대 후반의 청년 커트, 그리고 실재하는 것에 집착하는 행위예술가 마라가 그들이다.

첫 번째 자살 의뢰인 세연은 늘 입에 막대사탕을 물고 다닌다. 초반의 섹스 신에서도 그녀는 지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섹스보다 자위에서 더 흥분을 느끼는 세연의 모습은 피상적이다. 그녀는 비디오 아티스트인 형 상현과 택시기사인 동생 동식 사이를 오고간다. 자살이라는 근원적 고뇌 앞에서 갈등하는 그녀의 내면보다 외적인 장치가 더 어지럽게 펼쳐진다.

눈 덮인 차 안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린 세연, 그리고 퍼포먼스 도중 예술적 죽음을 선택하는 마라나, 다시 새로운 삶을 약속하는 커트처럼, 자살 도우미인 주인공에게 도움을 요청한 세 명의 의뢰인들은 각각 다른 방법의 결말을 선택한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이 작품의 주제가 선명하게 관객들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듯한 희미한 윤곽, 명확하지 않은 관념적 대사들, 그리고 선명하지 않은 인물들의 관계는 대중적 접근을 차단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전수일 감독은 ‘내 안에 우는 바람’이나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같은 독립영화들을 통해서 삶을 바라보는 진지한 시선과 철학적 성찰로 새로운 감성을 보여주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도 타인과의,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고독과 소외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자신을 파괴하려는 현대인들의 내면을, 감각적 영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 등장하는 트렌드는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10여 년 전의 것들이다. 영화 역시 제작된 이후 2년의 세월동안 창고에 묻혀 있다가 이제야 햇볕을 보게 되었다. 이런 사정이 이 영화의 감수성을 낡은 것으로 비쳐지게 한다. 건조한 대사들과 친절하지 않은 이야기 전개 방식은 관객들이 영화에 동화되지 못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영화 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 s2jazz@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