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한 유교적 지배질서 아래서의 연쇄살인이라는, 상호 모순되는 이미지의 충돌이 일으키는 상승작용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객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시키는 연쇄 살인극은 과연 범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그는 왜 그런 범행을 저질렀을까라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19세기 초라는 조선조 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서서히 붕괴되어가는 유교적 질서 속에서 인간 내면의 탐욕이 빚어낸 연쇄살인극은 소재 면에서 우리를 매혹시킨다.
때는 1808년, 개화기의 신 물결이 조선반도에 밀려들던 무렵, 동화도라는 섬에서 조정에 진상할 최고급 종이가 가득 실린 수송선이 원인모를 화재로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뭍에서 수사관이 파견된다. 그리고 그들이 섬에 도착한 첫날부터 참혹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5일 동안 모두 5건의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조선조 관리의 옷을 입은 수사관들이 연쇄살인의 본질을 파헤치기 위해 사건의 심장부로 접근해 들어가는 과정은 무척 현대적이다. 두 개의 시공간이 공존하는 듯한 퓨전적 발상은 ‘혈의 누’에 새로움을 부여한다.
동화도는 조정에 진상하는 고급 종이를 만드는 제지공장이 있는 섬이다. 제지공장은 섬 마을 사람들에게 부를 안겨 주면서 동시에 탐욕을 불러 일으켜, 7년전 제지소 주인인 강객주가 천주교인으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할 때도 마을 사람들 중 누구 한 사람 그것을 저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사건의 핵심공간을 동화도라는 섬으로 설정했으면 외부, 특히 뭍과 고립된 느낌이 살아나야 한다. 그러나 외부와의 연결이 단절된 고립된 섬의 이미지가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작품의 기본 바탕이 되는 공간적 배경 자체가 효과적인 발언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탐욕의 근원이며 섬의 존립 자체를 설명해주는 제지공장 역시 작품 전체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있지 못하다.
김대승 감독은 매일 하나씩 일어나는 연쇄적 살인사건을,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상승작용으로 끌고 가지 못하고 수평적으로 나열만 하고 있다. 그것은 섬이나 제지소 같은 공간적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는 빽빽하게 채워진 이야기로만 되어 있을 뿐, 그것들이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길을 잃고 헤매게 만든다. 답답한 것이다.
또 원규의 아버지가 7년전 사건과 연계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불필요한 복선이다. 만약 그 이야기가 힘을 가지려면 내러티브 상의 다른 변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원규의 위풍당당함이나 자존심이 수치심으로 변하는 그뿐이기 때문에, 전체의 극적 구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불필요한 에피소드로 끝나고 만다.
오랜 시간 준비한 영화답게 ‘혈의 누’는 땀 냄새가 배어있는 영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연쇄살인을 통해 미스터리 사건의 호기심을 갈수록 증폭시키는 데 실패했고, 특히 흐름의 완급 조절을 하지 못해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극적 구조 안에 밀어 넣음으로써 답답하게 진행된다. 결정적으로 이 영화의 기본 축인 멜로적 정서마저도 너무 급하게 전개되어서 잘 전달되지 않고 있다. 이것이 관객들의 좋은 반응을 얻는데 한계로 작용될 것이다.
<영화 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 s2jazz@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