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관은 사양산업이다.”
일견 맞는 말로 들린다. 저렴한 가격과 고화질로 108년 동안이나 디스플레이의 왕좌에 올라 있던 브라운관. 하지만, TFT LCD와 PDP 등 고품질 평면 디스플레이들이 등장하면서 브라운관이 ‘언젠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라는 관측은 수년 전부터 무성했다. 실제로 브라운관 세계시장 수요는 매년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특히, 모니터용 브라운관(CDT)은 LCD 모니터의 급성장과 함께 이미 퇴출절차를 밟고 있다.
하지만 TFT LCD와 PDP 시장의 급성장에도 브라운관은 여전히 세계TV 시장의 85%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TV 시장에서 브라운관의 기세는 여전하다. 그리고 그 시장의 60%가 삼성SDI와 LG필립스디스플레이 등 우리나라 업체들의 몫인 자랑스런 ‘월드베스트’ 상품이다.
◇일본의 오판, 한국의 승부수=다른 산업처럼 국내 CRT 산업의 경쟁력은 지난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미미한 수준이었다. 히타치·도시바·마쓰시타·소니 등 일본업체들이 시장과 기술을 선도하고 주도할 정도였다. 그러나 1990년대 국내 전자 세트 메이커들의 약진과 함께 삼성SDI·LG전자·오리온전기 등의 국내 업체들이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했고, 곧 일본 업체와 동등한 수준에 이르게 됐다.
2000년대 들어 일본 업체들이 브라운관 산업을 사양산업으로 인식하고 TFT LCD와 PDP 등 신규사업에 집중한 것은 어쩌면 그네들로서는 발빠른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난 99년 NEC가 먼저 모니터용 브라운관(CDT) 사업을 중단했고 2001년 마쓰시타, 지난해에는 히타치가 CDT 사업을 완전 중단했으며 소니도 2001년 미국 CDT 공장 가동을 멈췄다. 지난해 4월에도 마쓰시타와 도시바가 브라운관 사업을 통합하는 등 발빠른 구조조정이 이뤄졌다.
하지만, 우리 업체들은 반대로 승부수를 띄웠다. 브라운관이 기술력과 생산력으로 얼마든지 키울 수 있는 시장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지속적인 투자와 생산성 높은 해외로의 공장 이전 등 적절한 대응을 펼친 결과 마침내 삼성SDI와 LG필립스디스플레이 등 국내 기업들은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고 슬림 브라운관 개발로 신규시장을 창출해냈다.
결과적으로는 일본이 시장을 오판해 추가 투자를 못하고 고부가 기종 중심으로의 변신도 따라가지 못해 시장에서 퇴출당했다는 분석이다. 브라운관을 포기하면서 강조했던 TFT LCD와 PDP 등 신규분야에서도 국내 기업에 밀리고 있는 현실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제2의 전성기로=삼성SDI는 지난해 3분기 기준으로 기존 주력 사업이던 컬러브라운관(CRT)의 비중이 절반으로 떨어졌고, 그 자리를 모바일디스플레이와 PDP, 2차 전지 등 신사업이 차지했다. 자칫 브라운관 사업이 난항을 겪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다른 분야가 급성장한 덕분이다. 실제로 삼성SDI의 브라운관 사업은 꾸준한 성과를 내면서 지난해에는 브라운관 생산 34년 사상 처음으로 컬러 브라운관 판매량 7100만대를 기록하는 등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LG필립스디스플레이 역시 2001년 출범 후 3년간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지난해 2분기 창사 이래 처음으로 1140만 달러의 순이익을 기록한 데 이어 3분기에는 4배 가까이 확대된 4910만 달러의 순이익을 내면서 본격적인 도약을 선언했다.
이같은 실적은 BRICs 등 신규시장에서 TV용 브라운관 수요의 급격한 증가와 LCD 모니터 판매 부진으로 인한 모니터용 브라운관 판매 호조, 일본계 브라운관 업체들의 구조조정 등이 맞물린 결과다. 지난해 상반기 삼성SDI·LG필립스디스플레이 등 국내 브라운관 업체들의 생산라인 가동률은 100%에 육박할 정도였다. 꾸준한 선투자가 결실을 보고 있는 셈.
업계는 향후에도 디지털방송의 본격화와 슬림 브라운관 등 고품질 제품의 인기가 지속하면서 브라운관 시장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우리 업체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미 일본·대만 업체들은 손을 뗐고, 중국의 성장세가 무섭지만 우리 업체들은 고품질 제품으로의 방향전환이 이미 이뤄졌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다.
◇후방위 사업의 동반성장= 우리 브라운관 업계가 제2의 도약을 펼치면서 후방위 사업의 동반성장도 크게 기대되고 있다. 특히, 브라운관 유리 업계는 거대 중국시장에서 다시 한 번 용틀임을 시작했다.
지난해 11월 삼성코닝은 중국 선전에서 단일공장 기준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TV용 유리 제조공장 준공식을 가졌다. 중국합작파트너인 선전전자집단(SEG)과 함께 설립한 이 공장(선전SEG삼성글라스)에는 총 4억 2000만 달러가 투자됐다. 3기의 용해로에 모두 11개 라인이 본격 가동에 돌입해 TV용 유리 기준 연간 1600만 개의 생산규모를 자랑한다.
한국전기초자는 이에 앞서 지난해 5월 중국 후난성 장사시에 현지법인인 후난 HEG전자유리유한공사의 CRT용 유리공장 용해로 화입식을 갖고 연 600만 개를 생산할 수 있는 브라운관 유리 공장을 가동중이다. 이처럼 국내 브라운관 유리업체들이 중국에 잇달아 공장을 설립하는 것은 중국의 TV용 브라운관 시장 규모가 세계 단일국가 중에서 제일 큰 연산 6000만 개 규모이며 2010년까지도 지속적인 성장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에서 싼 가격에 생산함으로써 중국 내수뿐 아니라 해외시장에 대한 영향력도 키울 수 있게 됐다.
유리 업계 외에도 LG마이크론이 생산하는 브라운관용 섀도마스크의 성장세가 지속하고 휘닉스피디이도 스터드핀·글라스로드 등 브라운관 부품 분야 매출과 순익이 증가하면서 해외 경쟁 업체들을 확실히 따돌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술력의 값진 승리=지난해 8월 우리나라는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브라운관(CRT) 기술위원회(TC 39)의 국제간사국 및 국제간사를 수임해 브라운관 분야의 국제표준을 주도하게 됐다. 간사국은 해당분야 국제표준을 총괄관리함으로써 국제기술 동향의 신속한 파악은 물론 향후 브라운관 산업 변화에 대한 능동적인 대처를 통해 국제표준을 실질적으로 주도할 수 있다.
브라운관 생산 세계 1위인 우리나라가 국제표준을 주도하게 됨에 따라 브라운관 분야에서는 생산과 기술 모두에서 선도하게 된 셈이다. 국내 업체들은 생산능력을 올리기 위한 기술개발과 신규 시장 창출을 위한 기술개발 두 부문에서 모두 해외 업체들을 압도해왔다.
LG필립스디스플레이가 브라운관의 핵심부품인 전자총 히터의 성능을 대폭 향상시키고 재료비를 30%나 절감하는 고효율 히터를 개발해 연간 9억여원의 원가 절감 효과를 얻은 것이나 삼성SDI가 스티로폼 포장재 절감을 통해 연간 49억 원의 비용 절감 효과를 낼 수 있는 포장 방식을 개발한 것은 작지만 매우 중요한 사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내 업체들이 TFT LCD와 같은 신규 디스플레이와 경쟁하기 위해 브라운관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술을 계속 개발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브라운관의 해상도와 휘도는 계속 높아져만 가고 있으며 두께가 30㎝대에 불과한 슬림 브라운관을 개발해 마침내 LCD TV와 가격뿐 아니라 품질로도 직접 경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은 놀랍기만 하다. 업계 전문가들은 나아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나가는 브라운관이 향후에도 디스플레이의 왕좌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자신있게 내놨다.
◆브라운관의 역습
“브라운관의 역습이 시작됐다.”
지난해 10월 일본의 도쿄TV가 요코하마에서 개최된 ‘FPD 인터내셔널 2004’에 참가한 삼성SDI를 소개하면서 한 말이다. 삼성SDI가 출시한 슬림 브라운관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표명한 것에 다름아니다. 삼성SDI와 LG필립스디스플레이가 지난해 개발한 슬림형 브라운관은 60㎝대였던 기존 두께를 30㎝대까지 줄이면서 관련 업계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킨 데 이어 올 해 초 상용화 TV제품으로 등장한 후 소비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실제로 슬림 브라운관을 채택한 TV는 지난 2월 출시된 이래 단일 디지털TV 제품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출시 1개월 만에 월 판매량 2만대 고지를 넘어섰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본격적인 판매에 들어간 3월 한 달간 판매량을 조사한 결과 각각 1만대 이상을 판매한 것으로 집계된 것이다. 삼성전자 디지털TV 제품 중 현재 가장 많이 판매되는 일반 디지털 브라운관TV가 월 3000∼4000대 수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실적이다. 최근에는 삼성SDI가 4월 한달간 3만2000대의 슬림브라운관을 팔았다는 엄청난 실적을 발표하기도 했다.
물론 LCD와 PDP TV 가격이 계속 하락하는 상황에서 슬림형 TV의 기세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겠느냐는 부정적인 전망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아직 본격적인 양산체계에 돌입하지 못한 슬림형 TV의 경우 가격하락 요인이 그다지 많지는 않아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신제품에 대한 구매의향이 대단히 높은 국내 시장과 달리 기존 브라운관 TV도 잘 팔리고 있는 해외시장에서는 슬림형 TV가 상당한 인기를 구가할 것이 확실해 슬림형 브라운관은 지속적으로 브라운관 업계의 수입원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기대된다.
★평균별점
마케팅 ☆☆☆☆
기술 ☆☆☆☆☆
생산시스템 ☆☆☆☆☆
디자인 ☆☆☆☆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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