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디지털 대한민국](1)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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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은 일제 식민지 통치로부터 벗어난 지 60년이 되는 회갑(回甲)의 해다. ‘회갑’은 동양문화권에서 특별하다. 어긋나고 뒤틀린 것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숫자요, 사물이 성장해서 한번 소멸하는 완성된 과정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60년은 우리나라 산업이 태어나서 한번의 완성된 과정을 거친 기간이다. 그기간은 전자산업 성장과도 일치한다. 사회정치적으로는 일제 잔재 청산을, 경제적으로는 전자산업 부문에서 일본을 극복하는 도정이었다. 본지는 삼성전자와 LG전자 후원으로 총 12회에 걸쳐 해방 이후 60년 간의 전자산업 발달사를 정리하고자 한다. 6·25전쟁, 오일쇼크, IMF구제금융사태를 딛고 ‘주식회사 디지털 대한민국’을 이끌어온 기업의 시각에서 지난 60년을 되짚어 본다.

디지털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디지털 공화국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디지털 공화국이다. 산업 중추가 전자산업으로 이동하면서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정보가전, 정보통신 강국으로 성장했다. 그것은 식민지 점령 국가였던 일본과 치열한 기술전쟁의 결과였고, 우리 기업에게는 새로 쓰는 해방의 역사이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정치적으로는 일본의 종속에서 벗어났지만, 우리 기업은 지난 60년동안 일본의 기술종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해왔다. 2005년 8월 대한민국 전자정보통신 산업은 일본의 소니, 마쓰시타 등 글로벌 기업과 제2의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다.

 △우리기업 세계에 도전장을 내밀다=1954년 세계 가전업계는 충격에 휩쌓였다. 일본 소니(구 교토통신공업사)가 세계 최초로 트랜지스터 라디오 생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당시 RCA·GE·모토로라·CBS·EMI·필립스·지멘스 등 세계적인 전자업계가 트랜지스터 개발에 열중하던 때여서 트랜지스터를 이용한 세계 최초 라디오 완제품 개발은 ‘혁명’으로 불릴만 했다. 소니는 창업 8년째를 맞는 벤처기업에 불과했다. 소니는 여세를 몰아 1958년 세계 최초 트랜지스터를 이용한 TV를 개발, 발표했다. 소니의 60년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1958년, 우리나라에도 획기적 사건이 있었다. 자본금 1억환 규모 전자기기 제조회사 금성사가 설립됐기 때문이다. 금성사는 설립 다음해에 국산 전제제품 1호 진공관라디오 ‘A-501’을 생산한다. 이 시기를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원년으로 삼을 만큼 진공관 라디오 ‘A-501’의 의미는 각별하다. 그러나 소니가 트랜지스터 TV를 만들 때, 우리는 전자회사를 처음으로 설립했고, 트랜지스터 TV를 판매하고 있을 때 진공관라디오를 만들어 파는 후진국에 불과했다.

 △LG전자, 골리앗을 넘어뜨리다=리서치 펠로우(Reaserch Fellow)로 미국에서 비즈니스 모델 연구를 하고 있는 LG전자 우남균 사장은 1995년 7월 15일 미국 제니스사를 방문했다. 우 사장의 신분은 점령군 사령관 자격이었다. LG전자가 세계적인 가전업체 제니스 지분을 58%나 인수했기 때문이었다.

 우 사장은 이 곳에서 제니스 임원 미스터 프레스턴을 만났다. 프레스턴은 우 사장이 신입사원이었을 때 제니스의 한국 담당 간부였다. 그의 한마디면 LG전자(구 금성사)의 매출과 기술개발이 좌지우지될 만큼 그의 위세는 대단했다. 우 사장은 제니스의 주요 인사인 그가 한국을 올때마다 의전과 통역, 접대를 담당했다. 1974년 제니스는 매출 9억1000만 달러의 공룡기업이었고, LG전자는 매출 5300만 달러짜리 중소기업에 불과했기에 의전에 소홀할 수 없었다. 우 사장은 미스터 프레스턴이 방한할 때마다 공항에서부터 호텔까지, 약속장소까지 안내를 하던 사원이었다.

 오랫만에 만난 프레스턴은 점령군 사령관으로 방문한 우 사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20년 만의 변화였다. 5300만달러 짜리 중소기업이 세계 100대 기업을 넘어뜨린 결과였다.

 △삼성전자와 소니 ‘경쟁과 협력’=지난달 25일 미국 뉴욕타임스(NYT)에는 삼성전자와 소니의 협력관계를 심도있게 다뤘다. “세계 전자업계 절대 강자이던 소니가 수익성 악화를 타개하기 위해 삼성전자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기업으로부터 기술을 배운 삼성전자가 ‘일본 자존심’ 소니를 구해줄 ‘구원투수’가 됐다는 점, 바로 세계가 주목한 이유였다.

 삼성전자는 소니보다는 23년이 뒤진 1969년이 돼서야 창업했다. 삼성은 초기부터 완제품에서 부품소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품 생산에 관여하는 이른바 수직계열화를 모색한다. 삼성 수직계열화에는 일본기업의 도움이 필요했다. 삼성은 출범 후 삼성산요전기·삼성NEC·삼성일렉트릭스·삼성산요파츠·삼성코닝 등 일본 기업과 합작회사를 만들었다. 기술력 부족을 일본기업을 통해 메우려는 의도였다.

 지난해 삼성전자는 소니와 7세대 LCD 패널 공동생산에 합의한 데 이어 양사 간 포괄적 특허사용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다. 세계 최강 가전 업체 소니가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것, 삼성전자가 그만큼 강해졌기 때문이다.

 △주식회사 디지털 대한민국 위상=전 세계 PDP·LCD TV 10대 중 5∼6대는 한국 디스플레이 제품이다. PDP 패널은 지난해 4분기 우리 업체 점유율이 56%를 기록했다. 41.9%인 일본과의 격차는 앞으로 더욱 벌어질 전망이다. 브라운관 부문은 세계시장 점유율이 60%에 육박한다. CDMA에 대한 위상도 높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CDMA 점유율은 전세계 40%에 이른다.

 지난 2002년 기준 전자산업 부가가치 생산액은 약 32조1000억원으로 제조업 전체 부가가치 생산 중에서 약 18.2%를 차지한다. 국내 제조업 내 모든 산업 중 가장 높은 비중이다. 전자산업에 이어 화학제품, 자동차, 음식료품, 일반기계 등이 따르고 있다. 연도별 비중 추이를 보면 전자산업의 비중은 대체로 20%를 전후로 오르내리고 있을 정도로 국내 제조업에서 전자산업이 갖는 위상은 크다.

 IT기기, 전자부분품, 반도체, 백색 가전 등의 부가가치 생산 추이를 보면 반도체를 제외한 3개 부문은 2배 가량의 성장을 기록했다. 대한민국의 앞날이 전자산업에 달려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사진 한장으로 보는 전자산업

-국내 최초로 개발한 진공관 라디오 ‘A-501’

 LG전자(당시 금성사)가 1959년 국내최초로 개발한 라디오 ‘A-501’는 부품 국산화율이 60%가 넘었던 최초의 국산 모델이다. 라디오를 생산하게 됐다는 사실은 국내 전자공업사뿐 아니라 매스커뮤니케이션 발달과 근대화 정책 추진에 있어서도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방송보도를 통한 국민 계몽에 중점을 두었던 당시 정부로서도 1927년 경성방송국 개국 이후 32년 만에 국산 라디오를 통한 의식화를 도모할 수 있었다.

 ‘A-501’은 탁상용으로서 비교적 유려한 모양이다. 중파 및 단파 겸용에 2접점 3회로 로터리 스위치를 달았다. 케이스는 사출성형 기술이 어느 정도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다섯 가지 색깔의 케이스를 만들어 소비자의 취향에 따라 고를 수 있게 했다. 상표는 별을 모델로 하여 왕관을 연상하도록 만든 마크와 영문 표기 ‘GoldStar’를 잇달아 써놓은 문자 표지 등 두 가지로 구성됐다. 당시 락희화학 서울사무소 판매 3과장으로 금성사 신제품 라디오 판매를 담당했던 이헌조(前 LG전자 회장)씨 제의에 의해 만들어졌다.

 금성사 라디오 생산을 계기로 언론 보도가 이어지면서 국내에는 전기전자 산업에 대한 사회 관심이 높아졌다. ‘전자공업’이란 용어 자체가 생소했던 1960년도 신문에 ‘전자’란 용어가 소개됐고, 6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용어 사용이 보편화됐다.

<에피소드>

 LG그룹 창립자 구인회 회장은 1953년에 락희산업(반도상사의 전신, 현 LG상사)과 1957년 금성합성수지공업사(金星合成樹脂工業社) 등 계열사를 잇따라 설립,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플라스틱에 이어 1955년부터 생산된 ‘럭키치약’까지 성공을 거두자 구인회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사업분야로 진출을 윤욱현에 지시했고, 윤욱현은 라디오 국산화를 건의했다. 영어에 능통하고 전축에 관심이 많았던 윤욱현은 평소 전기전자관련 외국서적을 접하면서 라디오 개발이라는 꿈을 갖고 있었다.

 구인회는 이에 앞서 관공서 업무를 담당하는 서울사무소 최영용(금성사 전무 역임)으로부터 일본통산성의 경제백서에 석유화학과 함께 전자공업이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큰 유망분야로 적시돼 있음을 이미 보고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라디오 국산화를 놓고 락희화학 내부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국내에 라디오생산업체가 한 곳도 없을 뿐더러 미군PX를 통해 산뜻한 외제 라디오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었다. 아무런 경험도 없고 결과까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겠느냐는 얘기였다. 여기에 윤욱현 등 찬성론자들은 라디오 케이스가 플라스틱제이기 때문에 자체 기술로 감당할 부분이 적지 않으며 핵심부분은 외국기술을 유치하면 된다고 맞섰다.

 최종 결정은 사주인 구인회가 내렸다. 라디오 사업 검토 1년여 만인 1958년 1월, 구인회는 철회, 정회, 태회, 평회, 두회 등 형제들과 장남 자경(당시 락희화학 상무, 34세)을 불러모아 다음과 같은 요지의 결단을 내렸다.

 “우리가 언제까지 미제 PX물건만 사 쓰고 라디오 하나 몬 맹글어 되것나. 누구라도 해야 하는 기 안이가? 우리가 한번 해보는 기라. 몬자 하는 사람이 고생도 되것지만서도 하다보면 나쇼날이다, 도시바다 하는 거 맹키로 안되것나”

 라디오 개발은 성공했고 뒤이어 후속제품이 쏟아져 나왔다. 1961년에 ‘A-402’를 비롯, ‘T-602·TP-602· T-703·TP-801’ 등 5종이 나왔다. 이중 ‘T-602’는 트랜지스터 6석 라디오로 상당히 인기를 끌었었다. 1962년 말에는 트랜지스터 라디오 모델 8종이 시판될 정도로 트랜지스터 라디오 시대가 본격 전개됐다.

김상룡기자@전자신문, srkim@